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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오리너구리/밖을

[몽골] 1일. 밤. 울란바토르



만남. 그리고 lost 윤하

"게이트가 멀리 있으니까 비행기 시간 확인하시고 비행기에서 뵐께요"

인천공항에서 처음 본 윤하씨가 여권과 항공권을 나눠주면서 말했습니다. 멀어봐야 얼마나 멀겠어. 그냥 좀 멀겠거니 생각했는데, 공항 내부에서 한번 더 전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만큼 먼 길을 걸어서야 우리는 128번 게이트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작았던 몽골항공 비행기. 오른쪽 세줄, 왼쪽 세줄, 빽빽하게 채워앉은 사람들 중 나와 같이 몽골 여행을 할 사람들이 있겠지. 임소와 내 자리가 붙어있지는 않았지만, 근처에 있었던 걸로 봐서는, 분명 항공사에서 같이 티켓팅을 했으니 내 자리 주변의 사람들은 같은 일행이겠거니 생각하고 난생 처음보는 옆자리 남자분에게 짐 좀 위에 올려달라고 부탁했었죠. 그런데 이런. 공항에 내리고 보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시는군요. 초면에 부려먹어서 미안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쓰면서 내가 화장실만 가려고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승무원님. 맥주 한 캔, 물 한 병, 와인 한 잔, 커피 한 잔 꼭꼭 채워마신 사람에게 화장실 못가게 하는건 고문입니다. 라고 버럭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속만 부글부글 끓이던 찰나, 승무원이 딴데 눈 돌리는게 포착되었습니다. 저는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일어났..으나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앞자리 승객의 등과 임소의 가방에 쏟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화장실도 못가고, 민폐나 끼치고, 여행의 시작치고는 순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쳐졌지만 그건 화장실 다녀와서 바로 잊어버렸습니다.

몽골의 공항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복작복작 비행기 한 대에서 내린 사람들이 짐을 찾고, 임소는 그 사이 인포메이션에서 뭔가 책자를 찾아보며 우리는 몽골에 입성했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출국장. 내가 정말 몽골에 온게 맞는지, 아직도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출국장을 나서니 몇몇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는 한 청년이 하얀 종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인도로 가는길'. 종이를 보고 청년과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분명 한국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청년은 독특한 말투에서 한국인이 아님을 드러냈습니다. 청년을 따라 사람들과 공항 밖에 세워진 차량으로 이동하면서도 저 청년은 어느나라 사람인가, 에 대해 잠시 고민했습니다. 청년의 국적은? 당연히 몽골이었죠. 하지만 사진에서 본 몽골 사람들의 모습과 약간의 거리가 있었기에 저는 몽골 사람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여행 중간중간 만난 몽골 사람들의 모습을 미루어 봤을 때 그 청년이 비교적 도시적이라 저도 나름 틀린건 아니라 생각하지만, 제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몽골사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스스로 얽매여 바보놀음을 잠시 했습니다.

"박지현, 임소희.."
청년은 탑승자 이름을 부르며 체크를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명단에 적힌 사람은 다 있는데 한 사람이 비네요.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청년은 운전 기사분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때 문득, 출국장에서 짐을 기다리는 윤하씨가 생각났습니다.
공항에서 한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근데, 그게 길잡이었군요.
그래서 청년은 부리나케 공항으로 다시 갔습니다. 생각해보니 윤하씨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청년을 보고 너무나 당연하게 우르르 따라가버렸던 거죠. 당황한 윤하씨가 뒤늦게 차에 탑승하고 차는 징기스칸 공항을 빠져나갔습니다.

윤하씨. 괜찮아요. 우리는 윤하씨를 버리지 않아요. 늦게 찾으러 가긴 했지만.
그래도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알아챈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징기즈칸 공항 / 사진제공 : 선배님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청년은 자신의 이름은 몽흐졸, 한국 이름은 민수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몽골 인사를 가르쳐 줬습니다. 새끼새 모이 받아먹듯 열심히 따라했지만, 저의 단기 기억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 기억하고는 결국 다 까먹고 말았어요. 뭐, 까먹으면 또 물어보면 되지.

 


설레임

설레다

[동사]
1.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
2.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자꾸만 움직이다.
3. 물 따위가 설설 끓거나 일렁거리다.


호텔로비에 모여 앉아 열쇠를 받고,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로비에 모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열쇠를 꽂아 두 바퀴 돌려 문을 열고, 저와 임소는 가방을 내려놓았습니다. 



2성급 드림 호텔 (Dream Hotel) _ 임소는 씻는 중 :]


백팩 혹은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6인 이상 사용)에 짐을 풀어야 여행길에 오른게 실감나던 저로서는 호텔의 하얀 침대가 조금 낯설었습니다. 내일부터 몇일 동안 게르에서 잘테니, 첫날쯤은 이런 침대에서 자는 것도 좋겠지. 카페트 바닥에 짐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임소와 저는 우리가 챙겨온 비상식량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흘 고립돼도 살아남을 것 같은 음식들을 보니 좀 뿌듯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제공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뽀글이와, 임소가 싸온 기름없는 참치팩을 같이 먹기로 하고 제가 먼저 씻으러 들어갔습니다. 임소는? 가방 안에 있을때는 몰랐는데 꺼내고 보니 갑자기 많아진 짐을 다스리려 노력하던 중이었죠.

혼자 사는게 습관이 된 사람이 집 밖에 나갔을 때 제일 불편한 것은?
정답] 샤워하고 옷 입고 나오기
집 나와산지 9년, 기숙사 생활 청산하고 혼자살기 시작한지 6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이 습관이 보통 불편한게 아닙니다. 그나마 나의 불편함을 도와준 커다란 샤워타올. 제게는 백팩의 도미토리 침대만큼 호텔의 샤워타올도 여행의 지표입니다. 집에서는 쓰지 않으니까요.

이 시간에, 임소와, 낯선 숙소에서, 샤워타올을 두르고 멍때리고 서 있는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자니 조금씩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몽골에 왔다는건 모르겠지만, 난 다시 여행길에 올랐구나. 길 위에 올라섰다는 그 사실에 나의 마음 끄트머리가 간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깊은데 숨겨뒀던 바람의 조각이 부르르, 감동에 떠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더니 창 밖으로 달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