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상당히 길기 때문에 당신의 혈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혈압에 따라 아래 주의사항을 먼저 읽고 밑으로 내려가세요
정상혈압이시군요. 좋겠습니다. 난 저혈압인데. 쳇.
사람 건강은 혈압이 전부가 아닙니다. 전 간수치 낮거든요. 흥.
방심하지 말고 건강 챙기세요. 방심하다 한방에 훅 갑니다.
어쨌든 무리 없으니 밑으로 내려가셔도 좋습니다.
정상혈압이 아니시군요. 운동하세요.
고혈압,저혈압 다 귀챠니스트 전용 질환으로 공인될 수 있는 병입니다.
혈압 조절하는데는 유산소 운동이 좋다고 하는데, 알고는 있지만 운동 챙겨하기 어렵죠.
알죠. 그 맘. 그런 의미로 이번은 밑으로 내려가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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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는 뉘앙스가 왠지 지금 꼭 만나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가려던 참이었으니 얼굴이나 볼까. 머리 감을 시간은 없겠지만. '응. 어디서 볼까' 가방에 지갑을 넣으면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모자를 집어 쓰고 집을 나섰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 주문하는 사람,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 시끄럽고 복잡한 1층을 지나 그나마 조용한 2층으로 향했다. 간이 벽 뒤에 있는 테이블에 반쯤 나온 뒷모습이 낯익어 주저 없이 그 곳으로 향했다. 역시. 지윤이가 혼자 앉아있다.
"찌윤- 커피 시켰어?"
커피는 주문한건가. 주문하고 올라와야 하는가 잠시 고민하는 찰나에 지윤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어라. 나는 뭐라 말을 더 하지 못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냥.. 좀.. 미안.."
지윤이는 별 말도 없이, 소리도 없이, 굵은 눈물만 훔치고, 손이 눈물범벅이 되는 것을 보고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제 분명 새로 기름을 넣어서 휴지가 가방에 있을 텐데. 주유소 휴지는 형광물질 범벅이라 피부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휴지는 마른 휴지가 아니라 물티슈였다. 에이씨.. 꼭 필요할 때만 없더라. 주유소 휴지는 있어봐야 쓰지도 않고 짐만 된다고, 하필이면 어제, 물티슈 주는 주유소를 찾아가서 기름을 넣었던게 생각났다. 물티슈를 내밀기는 조금 이상해서 다시 가방에 대충 던져넣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지윤이는 계속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가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떨어져 탁자 위도 물기가 흥건했다. 테이블 몇개 너머에 커피잔 반납하는 테이블이 보였다. 저기라면 휴지가 있겠지. 혼자 앉아 울도록 두고 가는건 좀 신경쓰였지만, 잠깐이니까. 서두르는 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가니 커피숍 로고가 찍힌 갈색, 뻣뻣한 휴지가 보인다. 대충 집어들고 자리로 돌아와 지윤이에게 건냈다.
"미안, 놀랬제"
지윤이는 코를 훌쩍이며 웃으려고 노력하는 말투로 한참만에 말을 시작했지만, 웃음도 울음도 아닌 말투는 다시 눈물에 잠겨버렸다.
"괜찮아. 휴지 더 갖다줄까?"
"아니다, 이제 다 울었다. 미안"
덜 젖은 휴지 끝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고서는 비로소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한참을 울었던 눈이 빨갛게 민망한 웃음을 흘린다.
"왜, 무슨일 있어?"
"아니, 그냥.. 별 일은 없는데..."
지윤이는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힘들게 해서 그냥 좀 울고 싶었다고.
훌쩍이며, 말라가는 눈물을 정리하면서 한참 나눴던 이야기의 내용은, 그러니까, 일을 진행하는데 사람들이 지윤이에게만 일을 맡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일을 진행하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어떻게든 되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을 떠맏게 되어 있다. 되게 한다는건 가능성 있는 일을 찾고, 시도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한다는 거니까. 그리고 지윤이는 일을 시작하면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잘한다. 그러니 같이 하는 사람들은 지윤이에게 하나, 둘씩 맡기는지도 모른다. 이건 귀찮은데 지윤이가 잘 하겠지.
"사람들이 일을 완전하게 못해도, 찌윤이 더 손보려고 하지마."
"근데 있다아니가, 그게 잘못되는게 보인다. 저렇게 하면 안되는게 보이니까 손이 자꾸 간다."
"그러니까 놔둬. 그냥 삽질하고 고생하게 놔둬버려. 그 사람들도 고생해야 지들이 잘 하려고 하지. 찌윤이 이래저래 손 봐주니까 그냥 그정도만 해도 되는줄 알고 대충 하고 맡기는 것 같은데, 나는"
"응...글네.."
젖은 휴지를 손 끝으로 뭉치면서 지윤이는 눈을 내리떴다. 생각이 많아보이네, 커피랑 와플이나 잔뜩 먹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커피 시켰어? 와플이랑 뭐 먹을까?"
"아니, 됐다. 누가 또 불러서 좀 있다 가봐야 한다. 미안, 커피도 못마시고 가네.."
"에엣.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지 말라니까. 오늘은 가서 대강 들어주는 척 하다가 엎어버리고 나와. 에이씨발!! 드러워서 안해!! 하고. 꼭 씨발이라고 해야해. 그래야 놀라지"
내 농담에 지윤이는 푸시시 웃었다. 그리고 소소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우리는 일어났다.
지윤이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손 흔들던 나는 지윤이가 안보이고 나서야 걸음을 떼었다.
* * *
사실, 지윤이에게 말한거랑 다르게,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어디 들어가서 혼자 커피나 마시다 갈까. 좀 전에 커피숍에서 나왔는데 또 커피숍 들어가긴 별로라 서점에 가기로 결정했다. 뭐, 커피는 안마셨지만 그래도 그냥 다시 들어가기 혼자 뻘쭘했다.
오전이라 길가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혼자 돌아다닌지도 좀 오래된 것 같아 일부러 먼 길을 골라 돌아돌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음이 무거운데, 나만 그런건 아니구나. 걸으면 조금 기분이 가벼워질까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나, 전자제품 판매장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게 보였다. 사람들은 잠시 서서 티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특별한 소식이 있길래.
텔레비젼에서는 밝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앉아서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오른쪽에 떠있는 자막으로 대충 어떤 기사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인기그룹 멤버 S군. 자살미수]
아니 이건 또 무슨소리야. 요즘들어 부쩍 자주 들리는 연예인 자살소식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부려졌다. 박용하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러는거야. 이 사람들이 자살 계라도 들었나.. 혼자 중얼 거리면서 텔레비젼의 자막에 주의를 기울였다. 화면에서는 기자들이 우글거리는 병원 앞의 모습과 얼굴을 가리고 가는 낯익은 연예 기획사 대표의 얼굴, 그리고 무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기자가 나오고 있었다. 손으로 쓴 글씨가 빽빽한 종이 몇장이 비춰지고, 화면은 편지의 내용을 나타내는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유서 내용]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건 아무 소용 없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죽을 것 같이 아파도 그 인간들은 '왼쪽에 학교쪽으로 손 흔들어. 너는 좀 웃고...(중략)... 왜그래. 밑으로 들어간 돈이 얼만데, 이정도 고생은 각오 했어야지. 너만 힘든거 아니야.'이런식으로 밖에 말하지 않았다. ...(중략)...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며 나를 산채로 박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중략)... 여자친구, 있었다. 나도 사람이고 남자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이 나한테만 당연한 것 같았다."
짧은 문장이 빠르게 몇줄씩 넘어가며 보여준 화면은 S라는 가수의 유언장이었다. 자살 미수니까 유언장이라고 부르기는 좀 뭣 하지만, 어쨌든. 한참을 읽고 있는데 나와 화면 사이를 가로질러가는 아주머니 세명에 가려 몇줄을 놓쳤다. 아니 뒤에 길 놔두고 왜 꼭 앞으로 가야 하냐고. 또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줌마들을 향해 눈을 흘기다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서는 아직 몇 줄의 글을 더 보여주고 있었다.
[유서내용]
...(중략)... 욕심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 까지는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결국 형들은 날 버렸고, 난 형들에게 버림 받았다.
그리고 화면은 자필의 유서에 '난 형들에게 버림받았다.'라고 쓰여진 부분을 보여줬다. 다른 곳에 비해 글씨가 더 엉망이고, 짙게 쓰인걸 보니 아마 감정이 격했나보다. 문득, 그 그룹에 관한 요즘 소식이 생각났다. 소속사와 멤버들간의 불화, 그리고 몇명은 그 곳을 뛰쳐나왔고, S군은 기존 소속사에 남아 있으며, 그 그룹의 막내였었다. 나는 문득 씁쓸해져 화면에서 걸음을 돌렸다. 내가 빠진 자리에 뒤에 있던 아저씨가 들어서고,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시 길로 나섰다. 회사와 멤버들간에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당사자들이 아니면 모를 일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꽤나 떠들썩 했었다. 그리고 기존 소속사에 남아있던 멤버들에 대한 기사는 한정된 몇가지 밖에 없었는데, 특히 S에 대한 소식은 더더욱 없었는데, 결국은 저렇게 된건가.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 서점에 갈 생각도 없어져 그냥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길거리에 비춰주는 텔레비전의 많은 수는 [수면제를 과다복용 했으나 자살미수에 그친 S]에 대한 기사가 나올테니까.
마침 자리가 생기길래 냉큼 앉은 자리는 다리를 접고, 가방을 끌어앉고 앉아야 하는 자리였다.
가방을 벗어 안고, 짧은 치마를 입은채 한참 전화를 하는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가쪽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섰다 움직였다를 반복하는 버스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고보 있었다.어떤 마음까지 들었으면 죽으려고 했을까. 올해 나이가 몇이라더라.. 나보다 다섯살은 더 넘게 어린 것 같았는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넌 네가 죽고싶어서 죽는구나.. 어떤 애들은 살고 싶어도 죽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살고 싶어도 죽는 아이도 있고,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생각할 나이도 못됐는데 죽는 애들도 있다. S를 욕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렇다는거다. 지금 내가 가는 곳에 사는 아이들은.
* * *
그냥 봉사활동으로 방문하게 된 작은 고아원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제법 큰 봉사동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방문했던 고아원은 작고, 건물도 예뻤지만, 너무 인적드문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찾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찾아 오는길이 좀.. 힘드네요. 아하하"
"네- 어서오세요. 아유, 오시느라 고생 많았죠? 연락하신분이.."
그 곳은 조금 느낌이 이상했다. 우리를 맞아 아이들에게 안내해주는 선생님은 지나치게 친절했고, 방 안에 들어가서 만나게 된 아이들은.. 다른 고아원에 비해 많이 어린 것 같았다. 우리나라 아이들만 있는게 아니라 외국 아이들도 더러 보였다.
"애들이 좀 많이 어리네요? 다른나라 애들도 보이고"
"아, 네. 고아원이 여기만 있는게 아니고 몇개를 운영하는데, 각 분원별로 나이대가 정해져 있거든요. 여기 애들이 제일 어려요."
난 처음들어보는 시스템이었지만, 또래끼리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와 동호회 회원들은 일을 시작했다. 주변 청소. 장난감 정리. 망가진 책상다리 수리. 한참 일하고 있는데 아까 그 여선생님이 나와서 놀고있는 애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얘들아. 밥 먹어야지, 강당으로 들어가자"
나를 포함해서 맡고 있던 일들을 마친 몇몇의 사람들이 강당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어린 애들은 밥 먹는데 손이 더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데 강당 앞에서 선생님이 우리를 막아섰다.
"밥 먹는데는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애들에 비해 어른들이 좀 부족하지 않아요? 손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요, 됐습니다. 애들은 신경쓰지 마시고 저기 건너편 방에 가면 다과를 마련해 놨으니 좀 드시고 하세요"
그리고는 우리를 놔두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에 문틈으로 우리를 살펴보는 눈은 뭔가 기분을 오묘하게 했다.
"이상한데.."
"뭐.. 자기들 나름대로 방법이 있나보죠. 배 고픈데 가서 음식이나 좀 먹고 하죠?"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을 마무리 하고 나올 때 까지 아이들은 강당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애들 아직 안나왔어?"
"그러게.. 이제 우리도 가봐야 하는데.."
"제가 잠깐 가볼께요"
옹기종기 모여 갈 준비를 하고, 내가 담당하는 사람을 찾아보겠노라고 걸음을 돌리는 찰나 아까 그 선생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끝나셨네요?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봉사자분들 같은 사람들 덕분에 고아원에 있는 애들이 잘 지내는 것 같아요"
"애들은.."
"애들은 점심먹고 낮잠자고 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요."
환한 미소로 대답한 선생은, 우리가 갈 시간이 되어서야 자기가 이 고아원 원장이라고 밝히고는 다음에도 또 와달라, 일일히 악수를 하고 우리를 건물에서 내보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그 곳은 그냥 고아원이었고, 원장은 그냥 원장이었다.
두셋씩 모여 몇번을 더 가기도 했는데, 갈 때 마다 느끼는건 역시나 이상한 곳이라는 것, 원장이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고, 다른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어린아이들일 수록 손이 더 많이 가는법인데도 불구하고 원장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같았다. 다른 고아원과 다르게 아이들과 봉사자의 접촉을 꺼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몇몇 아이들이 안보이는걸 알아챘다. 워낙에 사람을 기억 못하기 때문에 안보이는 아이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눈에 띄이던 몇몇 아이들이 안보이면서 내 짐작은 맞다고 확신했다. 그런 짐작을 하면서 부터 나는 동호회 사람들과 방문하는 사이사이에 혼자 그 고아원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원장은 웃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더 자주 와달라고 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뭔가 뻑뻑한 시선이었다. 말을 안했다 뿐이지.
* * *
그렇게 그 고아원을 방문하길 몇 개월, 잦은 방문 덕분에 아이들은 날 알아보는 것 같았고, 1년쯤 지났을 때, 몇몇 아이들이 원장의 눈을 피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금 친해진 아이들과 가지고 간 과자를 한조각씩 나눠먹기를 몇차례, 한 아이에게 강당에서 뭘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숨죽여가며 말을 했다.
"그냥 쭉 앉아서 밥 먹어요"
"어른들은? 다 혼자서?"
"네. 어른은 원장선생님이랑 요리사 아줌마랑 아저씨 한명이랑 있어요"
"세명만?"
끄덕끄덕. 과자를 우물거리는 아이는 말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저씨는 누군데? 난 한번도 못봤는데?"
"아저씨는 강당이랑 뒤에 창고쪽에서만 일 한댔어요."
"아 그래..점심 먹고는 뭐하니?"
"먹은 그릇 앞에다가 주고 자리에 와서 낮잠자요"
"흠.. 그래?"
의외네. 원장의 눈빛은 그냥 내 기분일 뿐이었나.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데 옆에 앉은 다른 아이가 작게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낮잠자기 싫은데, 나도 안자고 작은방에 들어가서 놀고싶어요"
"작은방?"
아이의 말은 이랬다. 다들 낮잠 자는 시간에 몇몇 아이들은 강당 끝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놀수 있다는 거다. 놀고 나온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로운 장난감도 많고, 강아지랑 토끼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신 들어가기 전에 물약을 한컵 마셔야 하고, 나올 때 가루약을 한봉지 먹어야 한다고도 했다.
"약? 그게 무슨약인데?"
"몰라요. 아무 맛도 안난다는데.."
그리고 아이들이 작은방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유중 하나는, 작은방에서 놀도록 선택된 아이들은 얼마 기간이 지나면 다른 집으로 입양된다는 것이다. 즉, 입양 가족이 선택된 아이들만 작은 방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고 했다.
"그럼 그 애들은 가끔 놀러 오니?"
"아니요.."
한참 이야기하던 아이가 시무룩하게 말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이 꼬마와 잘 놀던 여자아이가 안보이기 시작한지도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제 친구가 입양되고는 자기를 잊었다고 생각해서 시무룩하구나. 새로운 가족과 살다보면 옛날에 살던 곳을 찾아오기는 좀 힘들긴 하겠지, 특히나 어린 애라면 더더욱.
"지금은 혼자 못와서 그런거고, 나중에 조금 더 크면 올꺼야. 여기는 언니가 오기에도 조금 힘들거든. 언닌 어른인데도 말이야"
"...그래요?"
조금 밝아진 아이의 표정을 보고 격한 긍정의 끄덕임을 보였다.
저기 멀리서 원장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얼른 돌려 보내고, 벌여둔 일을 주섬주섬 마무리 하기 시작했다. 원장은 지나가는 발걸음으로 일 하는 내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강당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원장 발소리가 안들릴 때 쯤 강당 뒤쪽으로 향했다.
강당을 한참 돌아도 창문 같은건 보이지도 않았다. 건물은 그냥 겉보기 예쁜 폐쇄형 공간이었던 것이다. 건물 뒷편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조금 튀어나온 공간이 보였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니, 강당 내 식당과 연결되는 문이 보였고, 그 뒤로 아이가 말한 작은방과 연결된 것 같은 마당이 보였다. 아이들이 말한대로, 흰 개도 한마리 있고, 미니토끼 두마리가 잔디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공간은 밖에선 보이지도 않던데. 좀 더 들여다 볼 요량으로 문을 지나 잔디로 다가가는데, 끼익,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나는 깜짝놀라 문 뒤에 기둥 구석에 납작하게 숨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숨어. 보는게 뭐 어때서, 봉사하러 온 사람인데. 생각면서도 나도 모르게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 숨어지지도 않아서,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금방 들킬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몸을 접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아마 아이가 말한 그 아저씨인 것 같았다. 나이는 좀 들어보이는데 뚱한 표정때문에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문 옆에 놓인 통을 열어 뭔가를 손에 든 통에 옮겨 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씨. 뭐야 이게."
기둥 반대쪽에 통이 있던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통을 슬쩍 들여다 봤다. 세제 통인가. 뭔가 인공적인 청량함? 뭔가 퐁퐁 냄새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고 통 바깥에는 영어로 뭔가가 잔뜩 쓰여 있었다.
"뭐라고 써있지? Danger... Do not.. 아 몰라. 먹으면 안되는거네. Remove.. ...젠장 영어."
영어공부 실컷 해봐야 아무소용 없다고 자책하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미정아. 이거 마시고 놀아야지."
몰래 들여다본 마당에는 아까 그 남자와 원장, 그리고 이제 뜀박질을 배웠을 만한 어린 여자아이 한명이 있었다. 남자가 작은 컵에 뭔가를 담아 한 꼬마아이에게 다가섰다.
"기사님, 얘는 좀 어리니까 물 더 섞어주세요. 앞으로는 물 한컵에 작은 한숟갈 타주시구요"
뒤이어 원장이 말하고, 남자는 들고 있던 컵에 물을 조금 더 타기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마당에 내려놓은 통은 분명 아까 들고 있던 통이었다. 미정이라는 아이가 그 통으로 다가가자 원장이 나긋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미정아, 그건 지지. 만지면 안돼요. 어차피 다 미정이 맘마 할꺼니까 손대지 말고 여기 와서 원장선생님이랑 놀자. 응?"
아이를 안아든 원장은 잠시 아이를 어르다가, 남자가 건넨 컵의 액체를 아이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 놀기시작하는 아이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서 다시 건물 앞쪽으로 나왔다. 내가 뭔가를 잘못 이해한건가. 남자가 들고 있던건 그냥 생긴게 같은 통일수도 있잖아. 영어 해석을 잘못했나. 한참 머리가 복잡했다.
"원장님, 강당 근처에서 무슨 통이 있던데, 통에 써있는 주의사항을 보니까 좀 위험한 것 같더라구요. 애들도 다니는데 어디로 치울까요?"
내 말에 원장이 잠시 미간을 모으더니 다시 웃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했다.
"설마요, 아이들이 있는데는 위험한건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통이라니.. 저는 보지 못했는데요?"
"저기 벤치 뒤쪽으로가면.."
"그 뒤쪽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사님께 부탁해서 둘러보도록 하죠"
"..."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자주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를 돌려 보내는 길에 원장이 말을 흘리며 나를 슬쩍 쳐다본다.
"아뇨, 제가 좋아서 오는건데요 뭐. 저도 배우는게 많고, 또.. 뭐 부담 안되니까 걱정 마세요"
원장의 눈길을 느끼고는 일부러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에 갔을 때 강당 뒤쪽은 철골과 공사자재가 잔뜩 쌓여있어 접근 할 수 없었다.
고아원 내 어느 곳도 공사하고 있지 않았고, 했던 흔적도 없었으며, 자재들은 완연한 새 제품들이었는데 원장은 공사하고 남은 자재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 * *
한 아이가 담장을 발로 차서 무너뜨렸다.
야.. 쪼끄만게 힘도좋다. 제 키만한 돌담을 얼마나 걷어찼으면 그게 무너졌을까.
나는 한참 무너진 담의 잔재를 치우고 있었다. 그 아이는 원장실에 가서 벌 받고, 한참 혼나고서야 운동장으로 다시 나왔다. 울먹울먹한 아이는 날 보더니 옆에 쪼그려 앉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왜그래. 왜 담을 망가뜨렸어."
"....."
아이는 한참 말이 없다. 가만보니 지난번에 낮잠자기 싫다고 말 했던 아이다.
난 아이에게 몇번 말을 붙여 보다가 결국 말 시키기를 포기히고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는 한동안 훌쩍이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작은방 가고싶은데, 난 안데려가주고.. 훌쩍... 다음엔 나 보내준댔으면서.. 훌쩍. 원장선생님 거짓말쟁이... 훌쩍... 미정이는 떼쓰고 울어도 보내줬으면서... 막 아팠는데.. 흑.. 난 말도 잘듣고 울지도 않고 더 튼튼한데... 흑"
아이는 말 하면서 점점 더 감정이 북받히는 것 같았다. 나는 장갑을 벗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손길이 더 갈수록 아이의 울음은 더 커졌다. 아이가 우는것도 우는거지만, 우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원장이 와서 한소리 할 것 같아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는 한참을 울다가 난데없이 왠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져 당황하고 있는 내게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세진이는 옛날에 나간 쟤 친구 이름이에요"
"아.. 그 안온다고 했던?"
'안온다'는 내 말을 듣고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 곤란하다. 게다가 난 아이가 우는건 질색이었다. 그런 주제에 고아원에 봉사하러 오느냐 하겠지만, 아이들이 항상 울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울면 달래주는건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이고.. 지금은 원장이 왠지 맘에 안들어서 염장지르는 마음으로 일부러 더 오는것도 있고.. 여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세상이 끝난마냥 주저앉아 울고있는 아이를 달래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지말고, 뚝. 이렇게 울면 원장선생님이 와서 또 혼낸다"
아이는 들은척도 안하고 계속 울었다. 그럼.
"언니가 원장선생님 한테 세진이 전화번호 물어봐서 세진이한테 놀러 오라고 전해줄께. 응?"
그제사 아이의 울음이 좀 잦아드는 것 같다. 나는 기회다 생각하고 계속 세진이에게 대신 연락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물론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냥 튀어나온 말이지만. 아이는 한참만에 울음을 다 멈추고 진짜? 하면서 날 올려다 봤다.
"응 그럼."
그런데 너네 원장님은 별로 안반가워 할 것 같긴 하구나.
주저앉아 울었던 통에 엉망이 된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고, 담장 주변을 마저 정리한 다음 원장실로 갔다. 원장은 책상위에 사진을 잔뜩 올려놓고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원장선생님"
"네, 무슨일이죠?"
원장은 웃으며 두 팔을 활짝펴고 날 맞이했다. 언뜻 보기엔 날 반가워 하는 것 같지만, 왠지 나를 몰아 쇼파에 앉히려고 하는 것 같아보였다.
"다른게 아니라, 세진이라고.. 기억하세요?"
"세진이요?"
"네, 뭐.. 아이들이 말하길 입양 갔다고 하던데,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 해서.."
"..."
"아니, 그러니까.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연락해서 한번 고아원에 놀러오라고 하는건 어떨까 해서.. 그러니까.."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원장의 시선에 변명을 시작했다. 잠시 날 쳐다보던 원장은 미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좋지못한 생각 같네요. 그 아이 입장에서 보면 고아원에서 기억이 꼭 좋기만 하지는 않을수도 있지 않을까요? 꽤나 어린나이에 갔으니 좀 크면 잊을수도 있고.. 아이 부모 입장이라면 별로 내키지 않을 것 같은데요. 물론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걸 생각해주는 마음은 좋습니다. 하지만 애들이 바란다고 다 해줄수는 없는 것도 있죠. 세상엔. 그런데....누가 세진이를 보고싶다고 하던가요?"
"네? 아니 뭐.. 애들 이름은 잘 못외워서, 그냥 그러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겁니다. 부모 입장이면 그럴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이만 가본다고 말씀드리려고 온김에.. 네.. 수고하세요."
원장은 웃으면서 원장실 밖으로 날 배웅했다. 하지만 분명 그 웃음은 비웃음 이었다. 입 한쪽 꼬리만 올라가는.
젠장, 고깝다. 터덜터덜 걸어가며 지갑을 보니, 돈이 하나도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날이 왜이러냐."
애 하나 달랜다고 괜한 오지랍 부렸다가 쪽팔리기만 하고, 스스로가 왠지 처량해졌다. 그냥 여기도 오지 말까. 그냥 내 기분이 삐딱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이상한 통의 내용물은 내가 직접 확인 한것도 아니니까, 에이 시발, 왜 돈은 없고 지랄이야. 화득하고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속으로 욕지기가 나왔지만, 그래도 집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수수료는 싫은데.. 잠시 고민하다가 드럽고 치사하지만 원장에게 돈을 좀 빌려야 겠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렸다.
* * *
다시 돌아온 고아원은 조용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닌데.
멀리서 아이들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걸 보니 강당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원장실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원장은 없었고, 책상위에는 일 하다 말고 나간 듯 뭔가가 잔뜩 널려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책상으로 다가갔다. 원래 이것저것 잘 구경하기도 하지만, 아까 왠지 못보게 했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걸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다가간 것도 있었다.
아까 본 대로 책상에는 사진이 널부러져 있었다. 사진은 미정이의 사진이었다. 아마 입양가기 전의 사진인가보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남기는걸 보면 사람이 영 나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사진엔 미정이'만' 있었다.
옷도 단촐하고, 반바지 반팔에 실내에서 찍은 것 같은 사진은 뭔가 일부러 찍어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한장 집어 들었는데 그 뒤에 있는 사진도 같은 옷에 같은 배경, 그리고 같은 자세로 미정이가 찍혀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다음 사진을 봐도, 그 다음 사진을 봐도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미정이만 빼고, 미정이는 조금씩 달랐는데 뭔가.. 점점 아파보이 는 것 같았다.
"아. 갈 때쯤엔 아프다고 그랬었지, 참"
낮에 울던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진을 찍은걸까. 아프다는 아이를 두고, 추억하기엔 좀 삭막한 배경인데.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사진 옆에는 두꺼운 앨범이 꺼내져 있었다. 앨범에는 '천사들' 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벽 한쪽 책장에 이만큼 두꺼운 앨범들이 대여섯개가 줄지어 있었던 것 같다. '행복', '추억'.. 이런 이름표가 붙어있는 앨범을 보면서 이 고아원은 입양 시키는데 꽤나 유명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상위에 있는 앨범을 넘기니 왠 남자아이의 사진과 이름, 일자, 나이가 적혀 있었다.
"김형철. 이 애 이름인가보네. 6살.. 뭐 여기서 어린편은 아니고.."
분명 원장이 들어와서 내가 자기 책상을 들여다 보고 있는것을 보면 유쾌한 반응을 하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뭐 앨범 보는거야 문제 될게 있겠나 생각하고 앨범을 넘겼다. 역시나 단촐한 옷의 아이와 의미 없어 보이는 배경의 사진들이 보이고, 원장은 참 취향이 고약하다고 생각하면서 한장, 한장 넘어갔다.
천천히 넘기던 앨범을 넘기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한장 더, 한장 더. 뒤로 넘어갈수록 아이의 얼굴은 형편없어졌고, 창백해졌고, 급기야 마지막엔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으며, 눈은 한쪽이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여 있는 아이의 팔은 처음과 같은 옷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는데, 뻘겋고 누렇게 진물러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 옆에는 멀쩡해 보이는,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이소라. 0000년 03월. 5세'
뒤로 넘어갈수록 소라는 코가 뭉그러졌고, 팔은 하얗게 곰팡이같은게 피었으며 마지막 사진 다음에는 소라 말고 다른 아이가 또 처음의 소라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정세진'이었다.
"설마.."
나는 책상위의 미정이 사진 더미에서 맨 마지막 장을 꺼냈다.
아이는 앉아 있지도 못하고 그냥 의자에 '놓여'있었는데, 앞에 봤던 어린아이들 보다 더 어렸던 탓인지 더 왜소해 보였다. 그 때 그냥 나는 나왔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에는 난 그러지 못했고 되려 그 사진을 자세하게 들여다 봤다.
아이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했고, 이제 갓 뛰기 시작했던 아이의 다리는 꼬여서 엉켜 있었으며, 아이의 입 주변에는 말라붙은 토사물이 보였다. 눈은 부어있어 뜨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원장실을 뛰쳐 나왔다. 나와서 한참을 뛰었다. 조용한 고아원에서, 소름돋는 고요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듯이 뛰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ATM 이 드문드문 서있는 시내까지 와 있었다. 잠시 서 있다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가까이 있는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찾으려고 문을 밀었다. 문을 미는 왼손에는 아까 미처 놓고오지 못한 미정이의 마지막 사진이 들려 있었다. 잠시 그대로 멈춰선 나는 사진을 들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고아원엔 갈 수 없었다.
* * *
버스가 한참 달리다가 섰다. 속도가 늦어지는 걸 보니 앞에 차가 막히는가보다. 지금처럼 이렇게 버스를 타고 고아원으로 가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한장의 사진으로 뭔가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동호회 사람들에게 알릴까, 경찰에 가야할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 한장으로는 부족했다. 동호회에 알리기엔 익명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있어 그 원장이 마음 먹으면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다시 그 고아원에 접근하는건 불가능해질테고, 아마 아이들은 계속 그런꼴을 당하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근처 경찰서에 가 이것저것을 물어본 결과, 그 고아원은 지역 내에서 평판이 좋은편이라 내 말은 씨알도 안먹힐 것 같은 상황이었다. 경찰과 주민이 입양가는걸 직접 봤다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해결법은 없었다. 그래서 난 다시 고아원에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 * *
몇 달 만에 찾아간 고아원은 여전했다. 원장은 예와 같이 과장된 웃음으로 날 반겨줬고, 경계하는 눈빛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원장실은 항상 잠겨있었다.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봉사일을 하던 중에 약간 밝은 피부의 흑인 꼬마 한명과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국 여자아이가 몇차례 안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어쩌면.
"얘들아, 혹시 이번에 작은방에 들어가는 애들이 피부 까만애들 아니니?"
"네. 맞아요 근데 둘이 비슷하게 까만데, 하나는 외국애구요 하나는 우리나라 애예요."
아이들은 마침 자기들이 잘 아는 이야기를 나에게 자랑하듯 조근조근 말 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을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작은방에 들어간지는 1주일이 안된 것 같았다.
얼마나 자주 사진을 찍는지는 모르지만 한 아이당 꽤나 많은 사진이 있었던걸로 보아 아직 희망은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엔 좀 많이 왔어요. 동호회 생긴지 3주년 기념이기도 하고, 제가 자주 오니까 개인적으로 정도 더 들고 해서, 일손좀 보태드리려구요."
3주년은 말이 3주년이지, 1주년, 2주년 행사는 술먹고 치웠던게 전부였다. 내 힘으로 안되면 머릿수로 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일전 부터 글 올리고, 전화하고, 옆에서 부추긴 덕분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 물론, 원장에게는 10명 정도만 갈꺼라고 했지만.
간만에 고아원이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다. 애들보다 어른 수가 더 많게 느껴지는건 내 착각은 아닌 것 같고, 좀 심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애들은 사람 많으니까 이 핑계에 뛰고 놀수 있고, 선물 많아 좋고, 사람도 살리고, 뭐 좋은게 좋은거란 생각으로 그 생각은 접어버렸다.
작은방에 들어간다는 아이 두명이 나란히 운동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리좀 와봐. 곰치오빠. 애들 귀엽죠?"
쭈뼛거리느라 다가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둘 다 사진에서 봤던 옷을 입고 있어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지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보였다.
"얘들 닮았지? 근데, 한명은 흑인이고 한명은 한국인이야"
"진짜? 장난 아니다. 꼬마야. 한국말 할 줄 알아?"
"피부색도 비슷하네? 한국 꼬마애가 좀 자존심 상하겠는데"
사람들은 곧 두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 모습을 본 원장은 부리나케 우리에게 뛰어왔다.
"얘들이 왜 여기 나와있지? 하하 얘들은 좀 아파서요. 얘들아 가자"
"그럼 병원엘 가야지, 내가 잘 아는 소아과가 있는데.."
"아니 괜찮습니다. 그냥 좀 조용한데를 좋아하는 애들이라서요"
원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곰치오빠를 쳐다봤다. 원체 눈치가 없어서 아이디를 둔치라고 바꾸길 심각하게 권했었지만 그 때 만은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었다.
"제가 조카가 많아서 잘 아는데, 소극적인 애들일 수록 사람손을 많이 타야해요. 얘들아 삼촌하고 놀까?"
쭈뼛쭈뼛 선 아이들은 놀고싶은 눈치로 원장을 바라보고, 곰치오빠와 나는 원장의 반응을 살피며 쳐다보고 있자 원장은 마지못해 아이들의 손을 사람들에게로 건넸다. 원장의 짜증섞인 얼굴에 기분이 내심 좋아졌다.
그렇게 온종일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놀고간 다음부터 난 일부러 두 아이를 자주 언급했고, 가끔씩 봉사오는 사람들도 그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통에 원장은 아이들을 예전만큼 단절 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두 아이들은 내가 봤던 사진속의 아이들 만큼 병들지 않았다. 하지만 안색은 조금씩 안좋아지기 시작했고, 가끔씩 원장의 제지가 없어도 제 몸이 안좋다며 자기들끼리 있는 시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냥 이렇게는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몰라도 해결 방법은 될 수 없었다. 뭔가 방법이 필요한건 알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힘이 없고, 미약한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인기그룹 S군의 자살기도는 왠지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 *
버스가 낯 익은 정류소에 멈춰서고, 난 가방을 안고 내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돌려매고 다시 고민에 빠져들면서 이제는 낯익다 못해 무의식적으로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길을 따라 걸었다.
다른 입양기관에 아이들을 등록할 수는 없을까? 일반인으로는 힘든가? 아니면 서랍속 깊이 넣어버린 미정이 사진을 들고 유아학대 방지 위원회 뭐 그런 조직이 있는지 알아볼까? 그래, 거기라면 사진을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하겠지. 조사라도 나오면 원장실에 있는 앨범들도 볼 수 있을텐데. 근데 그냥 조사나와서는 물건 못 뒤지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벌써 고아원 입구에 도달했다. 3주년 행사 이후로는 내가 와도 웃는척만 하고 나와보지 않기 시작한 원장이었다. 이젠 내가 와도 신경도 안쓰겠다 그건가.. 그림자도, 기척도 안보이는 원장이 되려 신경쓰여 고아원 여기저기를 들여다 보고 있는데, 몇몇 아이들이 날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누나. 뭐해요?"
"응.. 그냥. 원장님 어디 가셨니?"
"네. 병원에요"
"병원에?"
난 휘둘러보던 시선을 걷어 아이들을 내려다 봤다. 그런 사람도 아프긴 한가보지.
"네. 민희랑 조시가 아프다고 원장님이 데려갔어요"
"응?"
분명 민희랑 조시라면 그 두 아이들이었다. 왜 갑자기 아파서? 아니 그보다. 아프다고 병원엘 데려갔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게 걱정되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병원인지 알아?"
"차에 써있었는데.."
아이들이 말해준 병원은 의외로 도시 한복판에 있는 큰 대학병원 이었다.
"거기 원장선생님 친구가 있어서 치료 해줄꺼라고 했어요"
"누가 그래?"
"운전하는 아저씨가"
"아니야. 그 아저씨도 친구랬어"
"아니야. 그 아저씨는 기사아저씨 친구야"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고, 왠지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로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싸우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난 대학병원으로 갔다.
* * *
확실히 대학 병원은 크고 복잡해서 소아과 병동을 찾는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접수처에 가서 여자아이 두명이 혹시 입원했는지 물어봤다.
"한명은 흑인이구요, 한명은 한국애구요, 나이는 대여섯살 정도 됐거든요?"
"네. 오늘 입원했네요. 단순 복통으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되시죠?"
"아, 예... 사촌언닌데, 이모가 급하게 불러서요."
"322호입니다."
간호사는 바쁜 업무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병실을 불러줬다. 322호. 문 앞에서 문틈으로 병실 안 동정을 살피고, 아이들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다는걸 확인 한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언니"
"응. 얘들아. 원장님은?"
"좀 전에 의사선생님이랑 나갔어"
"그래.. 어디 아파서 왔어?"
허리를 숙여 침대에 누워있는 조시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나 안아파."
"쉿. 원장선생님이 말하지 말랬잖아"
조시가 대답하기 바쁘게 옆 침대에 있던 민희가 조시의 팔을 툭 쳤다.
"왜 말하면 안된대?"
"음.. 그러면 원장선생님이 거짓말쟁이가 된대. 의사 선생님이 친구면 다 들통날텐데. 원장선생님은 바보야"
"야아. 말하지 말라니깐"
툴툴거리는 조시와 반대로 민희는 자꾸 말을 숨기려는 눈치인걸 보니 원장이 민희에게 뭔가 다른 말을 한 것 같다.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원장과 마주치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이만 물러 나기로 했다.
"얘들아, 언니 여기온거 말하면 안돼?"
"왜?"
"음.. 그럼 또 못올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올 때 맛있는거 사올테니까 말하지 마. 알았지?"
"응. 언니 나 아이스크림."
"...난 과자가 좋은데.."
주뼛거리며 말을 보태는 민희에게도 알았노라고 약속 하고 병실을 빠져 나왔다. 저 애들은 뭐 때문에 여기 데려온걸까. 왜 왔는지도 말하지 말라고 시켜놓고. 계단을 향해 가는데 한 병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요. 선생님. 입원비는 걱정 없으니 그냥 일단 입원만.."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구요"
원장의 목소리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에 대화 내용이 중간중간 들렸다 말았다 했다.
"...그리고 나중엔.. 부검은 안하도록.. ..는 충분히.. ..이건 그냥 성의구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아무것도 직접적인 단어로 듣지는 않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던 말들. 앞으로의 전개에 내가 관여해서 막을 수 있는게 있을까. 수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고, 나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침에 울었던 지윤이가 생각났다. 지윤이는 내가 시킨대로 '에이시팔' 하고 엎고 나왔을까. 이렇게 내 일도 못하는 내 충고를 그대로 들어서 문제가 생긴건 아닐까. 아니 이건 내 일인가. 가만 두고보면 내 일은 아니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난 정의의 사도도 아니다. 하지만 생명은 그렇게, 누군가가 맘대로 해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따라다녔던 것이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들고 병원에 다시 찾아갔다.
"원장님은요, 아침에 한번 왔다가 가구요, 저녁에 또 왔다가 간대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조시가 신나게 말하고, 민희는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조시를 말리지는 않았다.
"있어보니까 어때?"
"음. 간호사 언니들도 예쁘구요, 사람들도 착해요. 그리고 밥도 맛있구요. 밥 먹고 약 먹고 나면 사탕도 줘서 좋아요"
이 말을 할 때는 민희도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저들 기억에서는 고아원 밖에서 지내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소풍온 것 마냥 들떠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일을 지내서 아이들은 병원 생활이 지겨울 때도 됐을 것 같은데, 아직도 처음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그 사이에 조시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고 잠자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 만이 달라졌다.
* * *
간만에 친구들과 모여 놀러 가느라 주말 병문안은 건너뛰고, 얼마 후 다시 찾아간 322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내가 잘못 들어왔는가 싶어 병실 번호를 다시 확인해 봤지만, 숫자는 정확했다.
"저, 322호 아이들 어디갔나요?"
데스크의 간호사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딱딱한 표정으로 답했다.
"애들 어제 중환자실로 넘어갔는데요"
"중환자실이요?"
"네"
뭔가 추가설명을 바란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자, 간호사가 더 이상은 자기도 모른다며 말해줄수 없다는 대답을 선수쳤고, 몇번 더 졸라봤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계속 돌아올 뿐이었다. 어지러웠다. 중환자실에 들어갈 만큼 나빠진 상황이 뭘까. 들어올때는 단순 복통이었다면서.
첫날 들려왔던 원장의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다.
"저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보고 갈께요"
간호사는 곤란하다는 표정과 짜증난다는 표정을 동시에 띄우고 날 쳐다봤다.
"애들이 먹던 약은 뭐 때문에 먹었던건가요?"
"약이라뇨? 애들 약 안먹었는데요. 처방도 없었고, 아침에 놔주는 링겔이 전부였어요"
분명 약 먹고 사탕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제조해준 약은 없다고 한다.
이럴수는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원장이 제게 할당한 정체 불명의 물약과 가루약을 병원에서 마저 먹어야 했던거다. 심지어 나는 약 먹고 사탕 먹는걸 보면서 잘 먹었다고 칭찬까지 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 같아 발 닿는대로 아무 병실 앞 의자에 앉았다.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망연자실이란 어쩌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무력감이라고 하는게 맞는걸까. 울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났지만 그것 마저도 힘들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어도 모자랐다. 이대로 계속 웅크리고만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그것 조차도 모르겠는데,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고 침대 하나가 내 앞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침대 뒤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병원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다른 환자도 있으니 소란을 피우시면 안됩니다."
"기자분들은 병원 안에서 사진찍지 마세요"
무슨 소란인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과 검은 정장을 입을 사람들의 손에 떠밀려 밖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한 뼘 정도 열린 병실 문틈 사이로 병실 안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부산을 떨며 링겔을 다시 꽂고, 짐을 정리하고, 몇 사람들은 누워있던 환자를 일으켜 세워 침대맡에 앉게했다. 환자는 사람들이 움직이는대로 힘 없이 따라 움직였지만 자기 의지는 없는 것 같았다.
옆으로 기울어진 머리가, 뜨고 있지만 촛점 없이 멍한 눈빛이, 그냥 산송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끝에 간당간당 앉아 있는 그 환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나도 시선 둘 곳이 없어 그냥 눈길을 그 곳에 두었을 뿐이었다.
해가 기울어졌다. 복도의 불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멍한 머리로,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그래도 병원을 떠나면 안될 것 같은 생각도 하고있어 갈피를 못잡고 있을 때, 아까 데스크에서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간호사가 앞을 지나가며 내 발을 밟았다.
"아 죄송합니다.. "
갔으리라 생각했던걸까, 간호사는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간호사는 뭔가 고민을 하는 것 같다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그.. 아이들 중에 외국아이가 좀 전에 죽었어요"
"..."
"그리고 다른 아이는 상태가 좀 좋아져서 다시 322호로 돌아갔구요"
"..."
"원래는 이것도 말하면 안되는건데.."
간호사는 여기까지 말 하고 종종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가버렸다.
그러니까, 두 아이가 한 방에 같이 들어와서, 계획된 약을 먹고, 중환자실로 갔다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둘이 같이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는 말이었지. 간호사 말은.
민희는 조시가 죽은걸 알고 있을까. 상태가 좋아져서 내려왔다는 말은, 그 전까지 안좋았다는 의미였을테니 아마 모를 확률이 더 높다. 하지만 빈 병실에 혼자 있다는걸 알게되면 어떨까. 차라리 사실을 전해 듣는 것 보다 그 상황속에서 혼자 남아 상상하는 쪽이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줘 일어섰다. 맞은편 병실의 환자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다. 일말의 미동도 없이, 눈도 반쯤 뜬채로. 저무는 햇살이 병실 안의 창문으로 들어와 환자의 등을 비춰 얼굴이 더 어두워 보였는데, 그 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걸음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낯익은 신발이 보이고, 사람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계단으로 내밀었던 발을 거두면서 전화 하는 척 벽을 바라보고, 원장을 등졌다. 뒤로 슬쩍 보이는 원장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순간,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을 원장에게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카메라를 빼았아 머리가 부서질 때 까지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 322호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보지 못했던 간호사가 322호에서 나왔다.
"아이 보호자인데요, 오늘 밤에 계속 있을꺼거든요. 여분의 담요나 뭐 그런거 있나요?"
그래. 죽은 아이의 애도 보다는 산 아이의 위안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민희 곁으로 왔다.
민희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왔던 덕분에 그냥 세수만 대강하고, 자고 있는 민희 옆 간이침대에 앉았다. 아이는 해쓱하고 혈색도 없었지만 다른 이상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간이 침대에 누워 이제 어떻해야 하나 잠깐 생각하는 중에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 * *
발 밑이 쑥 꺼지는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나. 꿈도 안꾸고 잠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머리를 다시 묶은 뒤 침대에 있는 민희를 바라봤다.
분명, 민희를 바라봤는데 보이는 것은 또 다시 빈 침대였다. 낮과 조금 다른게 있다면, 그 때는 말끔하게 치워진 주인없는 침대였고, 지금은 이불도,주인도 있지만 누워있는 사람만 없는 침대라는 것이 달랐다. 민희가 깨어나서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문소리도 못들었는데, 깊이 잠들었었나보네.. "
주섬주섬 일어나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복도로 나왔다. 비상구의 불빛과 맨들맨들한 복도에 반사된 빛만 파랗게 어둠에 빛나고 있었다. 반대쪽 끝에 희미하게 형광등 불빛이 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밖에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었다.
"...좀 무서운데..."
사실 많이 무서웠다. 그렇다고 모른척 하고 다시 잘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혼잣말을 하면서 벽에 등을 붙이고 조금씩 조금씩 어둠으로 나갔다. 차라리 새카만 어둠이면 좀 덜 무서우려나. 반사된 빛은 어둠을 가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 귀 기울였다. 온 병원이 고요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병원이 이렇게 조용해.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응급실 때문에 바빠 죽는다더니만. 다 뻥인가.."
그 때, 복도 중간즈음에서 타박타박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맨발소리. 분명 민희가 신발을 안신고 나갔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그 발소리가 민희일꺼라고 생각했다. 소리를 향해 걸어가보니 같은 층이 아니라 한층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병원은 영안실이 다른 동에 있고, 또 여기서 멀고, 또.."
굳이 중얼거리면서 한두차례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윗층의 복도도 마찬가지로 비상구의 빛만 가득했다.
"에이.. 없네.. 무슨 소리였지.."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는데, 뒤에 있던 방 하나에서 작게 불이 새어나왔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군가 불을 켠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불이 켜진 방의 문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린 방은 창고 같이 작은 상자들이 즐비하고 무슨 연구실처럼 유리병도 많았다. 누가 있나요, 불러보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멀쭉한 인영이 뭔가를 꺼내들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삼키고 뒤쪽 상자에 몸을 숨기면서 다가갔다.
민희는 아니었다. 꽤나 큰 사람이었고 남자였으며, 제법 높이 있는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 그 안에서 약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굉장히 중요한걸 찾은 것 마냥 병을 꼬옥 쥐었다. 내린 상자는 다시 원래 위치에 돌려놓지 않고 발치에 대충 놓았다. 왔다간걸 들켜도 별 상관 없나.
손 안의 약병을 한참 바라보던 그 사람이 갑자기 몸을 돌려 난 황급하게 상자 뒤에 숨었다. 그 찰나 어깨가 상자를 건드려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상자 사이로 바라본 그 사람은 긴장과 경계로 잔뜩 올라선 어깨로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봤다. 손에 쥔 약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으로 감싸쥐고 품 안으로 숨기는건 잊지 않았다.
방 안의 불빛 밑에서 긴장감에 형형한 눈을 보니 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오늘 낮까지 산송장 같았던 아랫 병실의 그 환자였다. 앉아있을때는 몰랐는데 서있으니 키도 제법 크고, 체격도 생각만큼 왜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낯익은 그 환자의 다른 모습도 떠올랐다.
그는 몇일 전 길가의 텔레비전에서 봤던 자살미수에 그쳤던, S군 이었다. 분명 그 때는 미수로 그쳤지만 가볍지는 않았던가. 아마 그동안 중환자실에 있었겠지 그리고 몇일이 지났으니 그도 깨어났던거다. 그를 살리려고 극진했던 사람들 덕분에. 아. 이제서야 비로소 낮에 복도에서 있었던 소란스러움이 이해 되었다. 그런데 S가 왜 이시간에 여기 있는걸까.
한참을 경계하던 S 는 다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발자욱 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가 있던 자리에 가서 내려놓은 상자를 집어들었다.
"....이건 어느나라 말이야."
알 수 없는 그림같은 글씨가 가득써진 상자는, 위험성을 알리는 심벌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나 의미를 알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심벌이 빨갛고, 노랗고, 중간에 대각선으로 줄이 그여있었다.
"쟤는 이 많은것들 중에서 어떻게 이것만 쏙 골라갔지.."
분명 미리 이 약을 알고 있었겠지. 아니면 손도 안닿는 높은 곳에서 약을 꺼내 단 한개만 가져갔을리는 없으니까. 나는 방을 빠져나와 S를 뒤쫓았다.
계단께로 가 조용한 복도에 귀를 기울이자 위쪽에서 타박타박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올라가자 잠시 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타박타박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쫓기를 몇차례, 긴장감에 예상에도 없었던 계단 오르기 덕분에 땀이 쏟아지는데 계단 오르는 소리가 더 이상 안들렸다. 나는 조용히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 때 타다다다다 소리가 나면서 복도로 뛰어 들어가 소리가 멈췄다.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내면서 소리가 끊긴 곳 까지 따라 뛰어갔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갔지.."
아니 그보다 어쩌다가 아이 찾으러 나와서 생판 상관도 없는 어른을 쫓는건지. 문득 왜이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려가면 왠지 민희는 다시 제 침대에서 자고 있을 것 같기도한데.
그 순간 내 뒤로 후다닥 소리가 났고, 뒤를 돌아 봤을 때 발 뒤꿈치 하나가 비상구 불빛에 그림자를 만들고 불 꺼진 병실 하나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느긋하게 그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불을 밝혔다.
불 밝힌 방 가운데, 180도 훌쩍 넘을만큼 큰 키에 울 것 같은 눈을 한 S가 나를 바라고보 있었다.
* * *
"...."
"...."
한참 말을 고르고 있는데 S 가 뒷걸음질로 빈 침대 너머로 몸을 옮겼다. 그래서 나도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하나를 마주보고 서로 대치하는 꼴이 되었지만, 일단은 내가 통로를 차지했으니 좀 더 유리하겠지 싶었다. 잠깐 근데 뭐가 유리하다는거지.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S는 동물의 왕국에서 봤던, 여차하면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한 야생동물을 생각나게 해 조금 긴장했지만, 경계하는 만큼 겁먹은 눈빛에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손에 든거.. 이리 줘"
"....."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영 묵묵부답이 아니라면 뭔가 상황을 해결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너.. 그거 뭔지 알고 찾아간거지?"
"....."
이번엔 무반응. 아마 맞다는 의미겠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아무말도 않은채 서 있었다. 어린 아이는 아니다. 이십대 중반이면 내 눈에나 어려보이지, 어른아닌가. 힘 쓰기로 맘 먹으면 내가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낮에 봤던 넋 놓은 모습은 연기였을까? 아니면 오늘 중환자실에 내려와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던가? 슬그머니 뒤로 약을 감추는걸 보니, 확실한 것은 지금 손에 들고있는 약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팔과 다리가 떨리고 있다. 식은땀도 조금씩 흘리고 입술도 창백하니 거칠어 보인다.
S는 지금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만 차리고 지금 자기가 있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나온게 분명했다. 저 약 때문에.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하니"
"...."
울 것 같던 눈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손의 떨림도 더 심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 같더니만, 툭. 눈물이 시트로 떨어졌다. 투둑. 훌쩍이지도 않고 눈만 깜빡이며 눈물을 훌리는 S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뭘까.
만약에, 저를 두고 의사를 부르러 간다면, 그 사이 여기서, 아님 어딘가로 도망쳐 약을 먹어버릴수도 있겠지. 그건 안된다. 아니면 계속 대치하고 서 있다면, 힘에 부치면 에라 모르겠다 약을 내 앞에서 먹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저지하려고 하겠지만, 그래도 자살소동이 있기 전 까지는 사회에서 번듯하게 살던 청년인데, 힘으로 대치하면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원래 극한 상황이 되면 힘이 세진다고도 하니까.
그러면 나는 눈 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누군가 죽는걸 관망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참을 버둥거렸지만 결국 조시를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그런 종류의 무력감은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러기 위해선 S 스스로 약을 내려놓게 해야 했다.
* * *
아직도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S에게, 짐짓 거만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훨씬 큰 S 를 깔보는 시선으로 보기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죽으려고 하면, 난 비상 버튼을 누를거야. 그럼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순식간에 이 병실로 오겠지. 그사이 난 널 말릴꺼고. 결국 넌 그 약을 빼앗기게 될꺼야. 앞으로 시도조차 못하하게 될껄. 같은 사고를 두번 친 사람은 특별히 더 감시하잖아. 낮이고 밤이고 넌 혼자, 자유롭게 있을 수 없어."
거짓말. 여기는 비상버튼도 없고, 있다고 해도 비어있는 병실에서 울리는 비상버튼 같은거 누가 믿고 달려와줄지 알 수 없지만, 지금 S가 감정적이고 몸이 많이 미약해진 상태라면, 내 말을 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들은 S의 시선이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시선과 상관없이 몸은 버티기 힘든지 조금씩 침대에 체중을 기대기 시작했다.
"대신, 나랑 약속을 해서 지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께. 그걸 뺏아 가지도 않을께. 그럼 넌 자유로우면서 언제든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
더 이상 눈물이 뚝뚝 흘리지 않았고, 적대감은 약간 누그러 진 것 같았다.
"결정해."
S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비로소 입을 떼었다.
"...약속이 뭔데"
목소리가 많이 갈라지고 탁했지만 생각보다 미성이라 새삼 또 어리게 느껴졌다.
"일단 오늘은 가서 자고 내일 이야기 하는게.."
"웃기지 마."
젠장. 어리게 느껴진다는거 취소. 낮에 봤던 그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몸이라도 멀쩡했으면 이미 엎었겠네. 그럼 이렇게 나랑 대치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으르렁 거리는 듯 한 대답에 움찔 했지만, 난 너 같은거 하나도 겁 안난다는 표정과 말투를 유지해야 했다. 상처 받은 동물에게는 등을 보이면 안된다.
"이야기 길어. 너 지금 혼자 서있기도 힘들잖아. 눈에 보일정도야. 듣다가 기절하고 싶으면 그러던가. 난 너 못들고가. 손에 약만 빳아가고, 의사든 레지던트든 간호사든 불러서 너 병실에 데려다 주라고 할꺼라고. 그 사람들이 물어보면 거짓말 할 자신은 없어. 그래도?"
"...."
S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긍정의 의미.
"일단, 가서 자. 대신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네가 그 약을 먹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 약은 네가 못 가져갈 곳에 놓아야 겠어."
"....."
어디가 좋을까. 민희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아. 민희.
자다말고 어두운 병원을 헤매고 다니게 된 이유가 떠오르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같이 병실에 가자. 가서.......... 서랍에 열쇠 잠그는데 있지? 거기 넣고 잠구는거야. 대신 열쇠는 내가 가져갈꺼야. 그리고 이야기는 내일 다시 만나서 하자. 알았지?"
S는 고개를 삐딱하게 외로꼬고 날 한참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식은땀이 눈에 보일만큼 생겼다 싶더니 결국 얼굴 옆으로 땀이 흐른다. 천천히 소매를 들어 땀을 닦고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끄덕였다. 분명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이었다.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어도 결국 그 약은 제게 있는거니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않을까.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느린 동작으로 S는 손 위에 작은 약병을 올려두었다.
얼마나 꼭 쥐고 있었는지 땀과 열기에 뜨끈뜨끈 했다. 약을 쥐고 내가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고 조금 거리를 두고 S가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그 모습이 안되보여 왼손을 내밀었으나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성질머리 하고는. 그러다가 힘 빠져서 계단에 엎어지면 버리고 갈꺼야.
앞에다 대놓고 쏴주고 싶었지만, 어린데다가 아프기까지 한 사람을 두고 유치한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뻘쭘하게 뻗은 손을 거뒀다. 몇걸음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휘청거리며 아슬아슬 하기는 해도 곧 잘 따라오고 있었다. 복도에 비치는 비상구 불빛이 아까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 * *
눈을 부비고 일어나 자고있는 민희를 잠시 내려다 봤다. S와 실랑이를 벌이고 병실에 돌아와보니 예상대로 아이는 다시 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가 일어나면 놀랄까 가방 안에 있는 수첩에 몇자 적어 옆 테이블에 놓고, 눈을 부비면서 병실을 나섰다.
S의 병실에 들어가 문 앞에 서자 S가 방 안에 있던 다른 두 사람에게 잠시만 나가달라고 했다. 어제만큼 탁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고는 아무말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 ...거 참.."
"...."
나는 좋지 않은 기분으로 닫힌문을 쳐다보고는 침대로 다가가 손에 들고있던 봉지를 건넸다.
"약속은 두 개"
"...."
"쳐다만 보지말고 열어봐"
S는 봉지를 대려다 보더니 힘없이 손을 들어 봉지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봉지 안에는 조금전에 길 건너편 문구점에서 사온 8절 스케치북 하나와 24생 크레파스가 있었다.
"...뭐야, 이게"
"첫번째 네가 할 일. 이 스케치북에 이 크레파스로 그림그려. 낙서라도 상관없어. 대신 크레파스 색을 최대한 많이 써야해"
"...장난해?"
"장난 아니야."
한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눈만 치켜뜬 채 반문하는 S 앞에 사물함 열쇠를 짤랑이며 말을 이었다.
"스케치북에, 최대한 많이. 제일 중요한거. 흥얼거리면서 할 것"
S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누구한테 들려주라는 것도 아니잖아, 혼자 흥얼거리는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래. 난 내일 올테니까. 싫으면 말고. 나가는 길에 아까 그 맘에 안드는 아저씨들한테 다 이르고 열쇠 넘기면 되니까 맘대로 해."
S는 고개를 돌린채로 소리없이 입을 작게 움직거렸다.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크레파스를 열어 검정색 크레파스를 반으로 뚝. 잘라 반만 통에 넣고 다시 닫았다. 검정색은 조금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할꺼지? 꼭 흥얼거려야 해."
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S를 놔두고 나는 병실을 빠져 나왔다.
다시 아이의 병실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쪽지도 그대로, 아이도 잠든 그대로 있었다.
한동안 아이를 쳐다보며 깨어나길 기다렸지만 아이는 뒤척임조차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마침 복도에 지나가는 간호사의 옷깃을 잡으며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간호사는 별 이상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보라고만 했다.
"내가 말하는 애가 누군지 확인은 해보고 기다리라는건가.."
속터졌지만 원장과 이야기 한 의사가 담당이라면 누가 신경쓴들 못미덥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아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얼굴색이 곧 죽을 것 처럼 나쁘지 않아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밖이 어두워지고, 복도의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걸음을 돌려 S의 병실로 향했다. 아까 보았던 두 사람은 병실 앞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다. 소리없이 병실 문 앞에 다가가 문에 슬쩍 귀를 기울여보니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마디 만에 자꾸 끊겨 노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끊기다 다시 시작되는 미약한 흥얼거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병실앞에 서서 소리를 듣다가 다시 걸음을 돌렸다.
* * *
다음날 까지도 아이는 잠만 잤다. 아이를 살짝 흔들어 봤지만 내가 흔든만큼 몸 옆에서 팔이 흔들리고말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원장이 병실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종이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원장 손에 들려있는 종이봉지를 보고 원장을 빤히 쳐다봤다. 옆에있는 뭔가라도 집어 던질까. 욕을 할까. 화가 치밀어 올라 속이 울렁거리는데 머릿속으로는 계속 생각이 떠올랐다. 가방으로 후려칠까. 약을 뺏아서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머릿속의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갈수록 나의 표정은 일그러져 갔고, 내 눈은 원장을 찔러버릴 듯이 쳐다봤다.
원장은 슬쩍 시선을 돌려 자고있는 아이를 보고 다시 나를 보더니 입가를 움직거리며 소리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일그러진 표정이 내 화를 더 돋궈 내가 참지 못하고 한걸음 움직이자 원장은 뒤로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열린 병실문을 바라보며 일렁이는 화를 좀 식히고 복도를 내다 봤을 때 복도에는 낯선 몇몇의 사람들만 있었다.
나는 한동안 침대 발치에 앉아 아이를 바라보다가 볕이 노랗게 침대에 기우는걸 보고 병실을 나섰다.
아래층에 내려가 S의 병실로 들어갔다. 한 남자가 나를 보고 S를 쳐다보자 S는 건성으로 고개를 슬쩍 움직여 나가달라는 표시를 했다. 두 사람이 병실문을 닫자, S는 침대 옆 테이블을 턱으로 슬쩍 가르쳤다. 테이블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있었다.
"간호해주는 사람들 치고는 좀 삭막하다"
"...간호는 무슨. 감시하는거 아냐."
아.그래. 나는 감흥없이 대답하고 스케치북을 집어들었다. S는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고 또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과 다르케 스케치북엔 뭔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앞,뒷장으로 많이 그려져 있었다.
"흥얼거리면서 했어?"
"....."
S는 고개를 돌린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보던 스케치북을 덮어 옆구리에 끼고, 말을 이었다.
"잘 했겠지. 그럼 두번째 할 일. 너 외출 가능해?"
"....왜?"
"이번엔 밖에 나가서 누굴 좀 만나는거라.."
"...누구"
"널 버렸다던 멤버 형들"
"뭐?"
내 말이 끝나자마자 S는 고개를 돌리면서 소리쳤다. 눈빛이 날이 선 것이 내가 원장을 바라봤을 때 저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내가 왜. 너 뭐야."
"너라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몇살이 더 많은.."
"됐어. 싫다고. "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거부하는 S를 쳐다보다 뒤로 한두걸음 물러선 뒤, 조금 떨어졌다 싶은 생각이 들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다시 눈 앞에서 짤랑짤랑 흔들었다. 열쇠를 본 S는 씨발. 하고 욕을 하더니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였다.
"어어. 밖에다 소리지른다?"
"....어우. 진짜!!"
S는 반쯤 일으킨 몸으로 약이 들어있는 사물함을 내리쳤다.
"저 사람들 감시하는 사람들이라며. 회사에서 보낸 사람들 아냐? "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누가 보냈어? 누가 시키든?"
"아니. 내가 뭐하러.."
"근데 왜!!"
S는 제 화를 못이겨 씩씩거렸고 나는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세를 고쳤다.
"가서 형들한테 '미안하다'고 와. 진심으로. 네가 진심이든 아니든 그것까진 내가 어떻게 못하겠지만 적어도 보는 사람이 진심이라고 느껴야 해"
"......어이가.."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누가 보낸것도 아니야. 괜한 오지랍같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갔다와. 죽는게 쉬울줄 알았냐?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방송에서 네 유언장이라고 나오더라. 형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너 20된 성인이야. 방송에 나온시간 아닌시간 다 합쳐서 10년정도 됐다며.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같다고 쳐. 뭣 때문에 갈라졌는지 난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도 이유가 됐다고 치자고. 근데 늬들 다 성인이야. 각자 자기 삶을 생각해서 선택한거잖아. 근데 형들은 날 버렸으니 그것때문에 난 죽는다. 안녕. 그렇게 잘못을 미루려고 한거야. 넌. 배경이야 이유야 어찌됐든 네 행방을 선택한건 너였으면서.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헛소리 하지 마"
"헛소리 같으면 그렇다고 생각해. 어쨌든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와. 싫으면 말고. 나도 심심해서 너랑 이러고 있는거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사과 받아야 할 사람은 나야"
"그래서, 죽으면 사과한대? 미안한 마음, 죄책감 갖게 하려고 그러는가본데, 그럼 뭐해. 그래봐야 넌 영영 몰라. 그게 무슨소용이야. 그리고 남이 뒤집어 씌운 죄책감은 시간지나면 잊혀져버려."
"....."
S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바닥을 쳐다봤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듣고싶은 말, 네가 가서 하고와. 네가 듣고싶은만큼 하고 와. 그게 이번에 할 일이야."
말을 마치고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병실 내 소란스러움이 복도까지 나왔는지 병실을 지키는 두 사람이 엉거줌하게 병실 문 앞에 서있었다. 나는 두 사람과 잠시 눈 마주쳤지만 곧 고개를 돌려 아이의 병실로 돌아갔다. 아닌척 할말은 다 했지만 좀 놀란 마음에 열쇠를 쥐고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 * *
병실에 돌아와보니 아이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민희야. 깼네? 어디 아프진 않아? 언니 누군지 기억나?"
"...."
깬지는 얼마나 되었나.
아이는 꼼질 거리는 제 손만 쳐다보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은걸까. 어떤 아이들은 크게 아프거나 충격을 받으면 말을 안한다던데. 침대 발치에 아이와 마주보고 앉았다. 아이는 손 끝을 꼼질거리는 것 마저 멈췄다.
"...."
"..일어났는데, 조시가 없어서.."
아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깜깜한데, 무서웠는데, 그래도 조시한테 가볼까 했는데.. 가다가 너무 무서워서 다시 돌아왔어. 근데 언니도 없는거야. 그래서 이불 속에 들어가서 눈 꼭 감고 잤어."
"..응. 민희 오래잤어."
"꿈에서 조시가 울었어... 아프지 않을꺼랬는데... 아프고 막 울어서... 미안했어..."
아이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나는 민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민희야. 원장선생님이 민희한테 뭐라고 했어? 조시는 모르는데 민희는 알고 있는거 있었잖아"
"...."
아이는 그 자세로 앉아서 아무말도 없었다. 눈은 꿈뻑이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숨을 쉬고있는지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싶었다.
"원장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아프지 않을꺼라고. 그런데 조시는 막 토하다가 입에 거품도 물고 팔 다리가 막 떨었어. 난... 무서워서, 조시를 보고 있으니까 나도 팔 다리가 막 떨렸어. 그리고 기억이 안나. 깼더니 조시가 없고, 언니가 자고 있었어."
중환자실에 가기 전 까지의 기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대로 조시가 죽었을 때 민희는 의식이 없었던가보다.
"원장선생님이 뭐가 괜찮다고 했어? 언니한테만 말해봐"
민희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타이르자 민희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아이의 눈은 메말라보였다.
"...말하지 말랬는데..."
민희는 고아원에 제법 오래 있었다. 처음 기억도 고아원이었고, 고아원 밖에 나가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제 단짝친구가 작은 방에서 놀도록 선택되었을 때, 그 친구 말고 다른 친구가 없었던 민희는 심심함에 못이겨 다른 아이들과 원장의 눈을 피해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친구는 입양 준비 때문에 따로 지내고 있어서 둘만 놀 수 있을거라는 기대로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친구는 참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나왔어"
속삭이는 목소리고 친구를 흔들어 깨웠지만, 친구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 왔다고"
민희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를 세게 흔들었지만, 친구는 계속 깨어나지 않았다. 그 때 뒤에서 원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민희를 불렀다.
"무슨일이니? 여긴 들어오면 안되는거 알잖아"
"...이상해요. 흔들어도 깨지 않아요"
자신이 여기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원장의 옷을 잡아당기며 급하게 말했다. 제 친구좀 깨워주세요. 이상해요. 원장은 민희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잠시 내려다 보더니 민희의 손을 잡고 방 안 다른 구석으로 갔다.
"친구는 좋은데로 간거야."
"...여기 있는데요?"
"몸은 여기 있지만, 좋은데로 갔어. 착한 아이였으니까."
"...거기는 좋아요?"
원장은 다정한 목소리와 미소로 민희에게 답했다.
"그럼. 아주 좋지. 나중에 나중에, 선생님이 같이 지내고 싶은 친구들 가라고 먼저 보낸거야. 그리고 나중에 선생님도 가면, 같이 재밌고 행복하게 살꺼거든."
"선생님도 가요?"
"응. 고아원에 있는 친구들이 다 어른되면 선생님도 갈꺼야. 민희도 가고싶어?"
원장이 빤히 바라보면서 물어보자 민희는 왠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원장이 민희의 손을 잡고 작은 방 밖으로 나오면서 게속 말했다.
"민희는 엄마얼굴 기억나니?"
".....아뇨"
"세상에는 엄마만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 그런데 엄마가 민희를 여기 두고 갔어. 그치?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말이야"
"......"
"선생님은 엄마보다 민희를 더 사랑해. 그래서 같이 사는거야. 알지?"
"...네"
원장 손을집고 땅만보고 걷던 민희가 걸음을 멈추고 원장을 바라봤다.
"그럼 원장님은 저 안두고 가요? 계속?"
"그럼. 원장님은 엄마보다 너희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나중에도 같이 살려고 친구들을 먼저 보내는거야. 좋은데로. 민희도 같이갈까?"
민희는 친구의 얼굴이 생각났다. 감기 걸럈을 때 잠든 것 보다 더 힘없어 보이던 모습.
"네.. 저도 가고 싶어요. 근데 전 아픈건 싫어요"
"그럼.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을꺼야. 지금은 먼저 가기로한 친구들이 있으니까, 민희는 조금 있다가 가자. 괜찮지?"
원장은 민희의 손을 잡고 강당을 나왔다.
"..그리고 몰래 다른 친구들도 봤는데, 다들 가기 전엔 시무룩하고 힘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난 그냥 여기 있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원장 선생님이 사랑해주는 사람만 데려가는 데라고 해서, 조금 힘 없어도 같이가고 싶었어요."
민희의 목소리가 좀 더 작아졌다.
"원래는 나 혼자 가는거였는데, 조시랑 같이 가게 돼서... 조금 싫었어요."
"왜?"
"원장 선생님이 나만 예뻐해주지 않으니까."
손 끝을 다시 꼼질꼼질 움직이면서 민희는 말을 그쳤다. 아이니까, 그래. 아이에겐 낳아준 엄마가 세상이고, 엄마와 떨어질 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들었다. 민희에겐 원장이 엄마 대신할 세상이었겠지. 사랑 받고싶은 아이의 이기심은 흔히 볼 수 있는거라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원장선생님이 안아프다고 했는데, 약 먹으면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그래서 강당에서 나오면 화장실에 가서 토했어요. 원장선생님은 안아프댔는데 난 아팠으니까 토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도?"
"..네. 병원 약이라고 했는데 약 맛도 똑같고,머리 아파서 원장선생님이 주는거랑 같은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사탕 먹으려고 일부로 먹고, 나중에 토했어요."
"......조시는?"
"조시는 별로 안이상하다고 해서 그냥 안토했어요."
조시는 단짝 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단짝 친구가 되어주는 대신 토하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고 했다.
민희의 말을 들으면서, 이 아이가 중환자실에 조시와 같이 올라갔다가 곧 상태가 좋아져서 다시 내려왔다는건, 상태가 좋아진게 아니라 원래 좋았던거고, 어쩌면 조시가 아픈걸 보고 그냥 놀라서 조시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잘못한거에요?"
"아니..잘했어. 민희야. 안아파야 하는게 맞아"
"그럼 원장선생님이 말한데는 언제가요?"
"거기는 안가도 돼."
"왜요?"
"...."
"그럼 원장선생님이 안예뻐 해줄지도 모르는데.."
"...."
"엄마보다 사랑해준다고 그랬는데.. 내가 약 안먹어서 그런거에요?"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더니, 곧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민희야. 내가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 처럼. 손을 잡아주려는 내 손을 뿌리쳐가며.
이 아이에겐 원장에게 받는 사랑이 삶에 대한 목적이었을까. 죽는다와 산다의 개념도 없을 것 같은 아이에게, 네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그 것 보다 네 생명이 더 중요한거라고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엄마보다 더 사랑한다는 그 말보다 더 크게 아이의 굶주린 사랑을 채워줄 말은 없는 것 같았다.
* * *
다음날 오후 느즈막이 들른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빈 병실에 들어가서 열쇠로 사물함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작은 약병을 꺼냈다. 사실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른 자살 방법을 찾아 혼자 어디로 가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사람은 나였는데, 이제는 내가 약속같은건 개뿔 지킬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고 약을 들고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S 주변의 누군가에게 사실대로 다 말해버려 다시는 자살 시도조차 못하게 하고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기획사에서 감시하면 잠깐의 틈도 주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자살이란걸 아에 포기하게 될 때 까지, 어쨌든 목숨은 붙어서 살아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S는 아예 세상에, 삶에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하지 않겠지만 삶에 대한 욕심도 없어질지도 모르잖아. 그런 삶을 사는게 죽은거랑 뭐가 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게 왜 난 또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도록 스스로를 몰고갔나 작은 탄식이 나왔다. 이 약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침대에 앉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문 밖에서 사람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S가 들어왔다.
"...."
"...."
S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병실 문 앞에 서있었다. 정말 다녀왔을까. 다녀온 척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트집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싶은 마음으로 일어서 S에게 다가가며 찬찬히 훑어봤다.
"뭘 봐..."
어제 만큼 뚱한표정도, 툭툭 뱉는 말도, 별다른건 없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눈가가 붉다. 얼굴은 어찌어찌 수습하고 온 것 같지만 눈물의 소금기가 남아있는 눈가는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것 같았다.
"..흐음.. 진짜 다녀왔나보네"
"....이제 내놔."
"미안하다고 했어?"
"...."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오는게 목적이었잖아. 지금처럼 똥씹은 표정으로.."
"아 씨 드럽게 진짜.."
"...지금 같은 표정으로 그냥 말만 툭 던지고 온거면 안돼. 진심이든 아니든 듣는 사람은 진심처럼 느끼게 말 하고 와야지. 다시 가는것도 이상하고, 두 번 째는 못지킨걸로.."
" ...하고 왔다고. 진짜로. 씨발 쪽팔리게 너 때문에 형들 앞에서 울고.. "
세번째는 못지킨걸로 하자는 말이 나올까봐 급하게 대답하는 S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곧 죽겠다는 놈이 쪽팔린건 싫은가보지? 뭐 어때 다시는 못볼껀데"
"...."
"그래, 형들은 정말 널 버리고 간거라든?"
나는 S와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나 침대에 걸터 앉았다. S는 내 질문을 듣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퉁명스레 답했다.
"알거 없잖아"
"어차피 갈 마당에 이야기나 해줘. 내가 누구한테 말 할것도 아니고, 내가 말한다고 사람들이 믿을것도 아니고."
"......씨발.."
서 있던 S는 욕을 하면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울려면 여기 앉아서 편하게 울어. 이제 울고 싶어도 못울어. 죽고나면."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걸까. 그 상황이 생각난걸까. 눈을 가리고 얼굴을 위로 치켜든 채 서있는 S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먹먹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약을 들고 도망쳐볼까 싶은 마음 한편엔, 자길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진짜 갔다온 '약속'의 무게가 무거웠다.
나는 S의 팔을 끌어 침대에 앉혔다. 안 움직이려고 버티다가 못이기는 척 침대 끝에 걸터앉은 S는 눈에서 계속 손을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옆을 둘러보니 테이블에 티슈가 있기에 티슈를 몇장 뽑아 얼굴에 올린 손을 내려 쥐어줬다. 손에 가려있던 부분은 눈물이 손 자국처럼 고여있었다.
"자. 여기"
아까 꺼내든 약병을 젖지 않은 손에 올려주자 S는 티슈로 얼굴을 닦다 말고 약병을 가만히 내려봤다.
"....같이 있어줄까?"
"....아니"
"....그래"
문득, 약을 삼키는 순간,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의식이 가물어 갈 때 혼자 있으면 더 슬프지 않을까, 해서 말을 꺼냈는데 S가 거절했다. 그렇겠지. 몇 번 이야기 한 남이 있어준다고 다스려질 슬품과 외로움이었다면, 의식을 놓으면서 더 슬퍼질데가 있는 삶이라면 수면제를 그렇게 집어 삼키지 않았겠지. 뭣보다 내가 있으면 끝까지 방해할 가능성도 좀 있고.
"여튼.... 끝까지 아프지 말고."
죽겠다는 사람에게 아프지 말고 잘 죽으라는 말인가. 해놓고도 이상했다. 그래. 그게 걱정되면 자살을 말아야지. 난 약먹으면 속쓰리고, 높은데는 무섭고, 칼에 베이면 아파서 못죽을꺼다. 아마. 잡생각이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털고 병원 밖으로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아원과 조시와 민희와 S. 죽음과 가깝게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산 채로 무덤안에 있었던 기분이 들어 밝은 세상이,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몸을 움직여 약을 쥐고 있는 S의 손을 잡았다.
"이제 말리는 나도 없어질테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네 맘대로 할 수 있어. 근데 S. 한번만 더 잘 생각해봐. 살아있을 땐 죽는걸 선택할 수 있잖아, 근데 죽으면 다시 살 수는 없어. 아직 다 못보고 못해보고 가는 것들도 많을거고, 다시 살아날 기회도 없을텐데, 억울하지 않아? 안 아쉬워?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을 마음으로 도망가서, 어디서 어떻게든 그냥 살아보면 안되겠어?"
S는 대답도, 반응도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약을 넘겨준 순간 나는 나의 몫을 다 하고 퇴장해야 할 인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과 같이, 그 사이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잠시 S를 보다가 손을 놓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나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병원 문을 나서자 바깥 공기가 훅 느껴졌고 살 것 같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나보니 아침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호화 시청이 부도난 이야기, 공천을 두고 싸우는 이야기, 한미 합동작전에 중국이 심사가 뒤틀렸다는 이야기, 무슨 영화가 개봉됐다는 이야기... 많은 뉴스들 사이에서 내가 걱정하는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봤다.
지윤이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너무 이른시간이라 조금 후에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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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이야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꿈입니다. 꿈 이야기 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시간 꼭꼭 밟아서 꾼 95% 꿈과,
아무래도 꿈은 그 상황과 분위기와 기분과 내 생각과 기타 등등이 3D영상(?)인데 반해 그걸 글로 쓰려니 어쩔 수 없이 덤으로 붙는 5%의 어조사, 접두사, 접미사 기타등등..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니 대체 왜? 스러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꿈은 제 맘대로 꾸는게 아니라서요 -_-
제 맘대로 할 수 있었으면 일단 처음에 지윤이와 헤어지고 커피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겠죠.
고아원 봉사는 가지 않았거나, 갔어도 원장이 맘에 안들면 박차고 나왔거나 했을껍니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거죠.
간만에 꿈 영향력에 휘둘려 이틀을 정신 못차렸는데, 이렇게 덜어내고 나니 가볍습니다.
꿈쓰기는 초콜릿 바 완제품을 분리하는 것 같네요. 우물우물 씹어서 맛을 보고 삼키는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주물주물 해서 땅콩조각 몇 개, 캬라멜 몇 g, 아몬드 몇 개, 초콜릿 얼만큼... 명확화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주말에 다 적었는데 -_- 그냥 삭제해버릴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놔뒀다가
쓴게 아까워서 안삭제함;;;
S 라고 했지만 실제 꿈 속에서 나왔던건 동방아가들의 막내 심창민군이었구요,
아침에 뉴스 틀면서 진짜 그런뉴스 나올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_-
하지만 내 꿈은 보통 개꿈 ㅋ 꿈만 제대로 맞았어도 로또 네댓번은 됐을꺼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