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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않는늑대/동양늑대

숙자이야기



"그러니까, 핑계일 뿐이라는거야. 내가 숙자인건 어쩔 수 없지. 
우리 아버지가 동사무소 가다가 싸움에 휘말려서 고모가 돈주고 지어온 해인이라는 이름 까먹고, 그 싸움판에서 이겼던 아줌마 이름 숙자가 생각나 그냥 숙자로 지은걸 어쩔꺼야. 그 때부터 내 삶의 제목은 '숙자의 삶'이 되어버린거니까. 근데 숙자 이름으로 숙자 인생을 산건 결국 나라구. 그 많은 선택의 결과는 내 이름이 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지. 안그래?"

아. 그래. 이름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듣게 된 이야기였다.

해인이가 될 수도 있었던 숙자는 앞에 놓인 음료를 크게 한 입 쭉 빨아서 두 번에 나눠 삼키고는 마른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이야기를 계속이었다.
 
"그 때 나무냄새가 좋아서 한옥 짓는거 배우러 떠나고 싶었을 때도, 정말 간절했다면 다 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을까?"

아마도.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숙자는 우유부단 한 것 같지만 하고 싶은건 가끔 저질러 버리는 성격이었으니까. 대나무로 엮인 의자 자국이 다리에 남을 것 같은 생각에 몸을 좀 움직여 봤지만 그래봐야 자국이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 그냥 자세만 고쳐앉고 말았다.

"두 달에 백만원내고 기본 과정만 배우면, 그 뒤는 일 하면서 일 배우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살 수 있었거든. 배우고 싶었는데 돈이 없는거야. 그 백만원이. 그래서 내가 선택한건 도서관에 앉아 한옥과 관련된 책만 죽어라고 읽는거였어. 한옥 짓는걸 가르쳐준다는 기사는 고이 지갑에 넣어두고 말이야. 정말 하고싶었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서라도 갔어야 하는거 아니니?"

"그럼 왜 그렇게 안했는데?"

"생각만 했던거지. 하고싶다고.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도 잠깐 했었지만 왠지 한옥이 너무 궁금해서 그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어. 근본적인건 제쳐둔 채 도피만 했다고나 할까"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야외의 커피숍이 좋다며 굳이 밖에 앉자고 고집부리던 숙자 덕분에 야외 테라스에서 점점 식어가는 커피를 마주하고는 있는데, 왜 꼭 야외로 나와야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가 유럽도 아니고, 그냥 시내 한 복판에 매연을 마시면서 꼭 밖에 나와 있어야 하는걸까. 옆에 지나가는 차 소리에 시선을 돌리고 인상을 쓰고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손을 홰홰 저으며 숙자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말도 안되게 나는 그 때 내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어. 왜냐면 옛날 옛날에 내가 하고 싶은걸 못하게 했다고. 사실 내가 하고싶다는건 대부분 하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말싸움은 오랫동안 했지만 가둬놓고 뜯어 말리거나 그런건 아니었는데 말이야.결국 말싸움하는데 스트레스 받고 관둔거면서 그 때 나를 왜 말렸느냐 이거야. 안말렸으면 하고 싶은거 하면서 잘 살았을텐데. 웃기지?"

"다들 부모님이랑 그런 과정 없는 사람이 어딨어"

식어버린 커피는 맛이 없다. 그래도 한 모금 마셨다. 
나도 한참 엄마와 싸우던 그 때가 생각났다. 스스로 못된 딸이 아니었던 나는 결국 엄마의 만류를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착한 딸도 아니었던 나는 엄마가 되었으면 했던 것은 결국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엄마도 나도 모두 한발씩 양보한 셈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던 결말. 그냥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막았으니 싸움의 완전한 패배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위했던 그 때가 생각나 입이 씁쓸해졌다. 카라멜이 들어있는 뜨거운 커피를 새로 시키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때 부모님이 안말려서 포기 안했다면 살면서 뭔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관뒀겠지. 그 순간에 못해내는 사람은 다른 순간에도 못하는 법이야"

"그렇게 보기는 좀 그렇지 않아? 살다보면 실수나 뭐 그런것도 하고 살 수 있는거지. 매번 옳고 좋은 선택만 할 것 같으면 그게 사람이겠어?" 

숙자는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유의 손사래도 작게 치면서.

"그래. 맞아.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의지의 정도에 대한거였어. 그정도 간절함, 그정도 의지였다면 누가 막아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 핑계로 그만둘 수 있다.. 그런거??"

거기까지 말 하고는 숙자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말을 한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숙자의 눈빛은 나 때문이 아닌 다른생각 때문에 복잡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숙자가 하고 싶은 말은 뭐였을까. 그래서 숙자는 지금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였나. 아니면 자기 삶은 자기가 삻아야 한다는 지론을 펼치려고 했었나. 그렇게 보기에는 숙자의 표정이 눅눅해보였다. 

왠지 숙자는 나에게 이야기 한게 아니라, 그렇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척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러니까 결국 제 탓이라는 그 말을.  

어쩌면 그냥 아무 생각 없는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피식 웃음이 났다. 
픽 새는 내 웃음에 문득 고개를 든 숙자는 잠시 날 쳐다보다가 '음료나 하나더 먹을까..' 하면서 메뉴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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