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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않는늑대/동양늑대

낯선여자



그녀는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무단횡단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들이 밀려와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길 건너편의 서면 CGV는 내가 서있는 인도보다 불빛이 화려했다.
한 여자가 서있다. 반걸음. 횡단보도와 가깝게 서있는 그녀는 나보다 조금 더 커보였다.
검은 파마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 산발같아 보였다. 무심한 표정. 무심한 안경. 무심한 코트.
한쪽 어깨에 매달린 카키색의 컨버스 가방은 끝이 닳아있어 어쩐지 처연했다. 길 건너편에서 오돌오돌 떨며 서있는
여자아이들의 화려한 레깅스에 비하면 그녀의 바지는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코트 뒤로 서걱거리는 회색 바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른쪽 사선너머의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소리가 났다. 바람은 날카롭게 얼굴을 긁고 가는데 소리는 뭔가에 막힌듯 둔했다.
허공에 맴돌던 그녀의 시선이 왼손으로 향했다. 나의 시선도 그녀의 왼쪽 코트주머니를 향했다.
긴장감 없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뭔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
그녀는 고개를 땅으로 떨구었다. 뭉툭한 어그부츠의 콧망울이 길을 쳤다.
툭.툭.툭..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퍼졌다.
툭.툭.툭.. 땅을 보고 있었으나 수줍고 해사한 미소였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녀도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와 함께 핸드폰을 떠올렸다. 손은 답장하지 않았으나 미소가 화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더이상 무심하지 않았다. 지나쳐가는 여자아이들의 레깅스에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미소가 흔들렸다. 코트 뒤의 회색 바람은 더이상 없었다. 
그녀는 낯선 여자였으나,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여자는 아니었다.
미소가 따뜻했다.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사랑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