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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않는늑대/동양늑대

SCENE






눈꺼풀이 무겁다. 눈이 뻑뻑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날이 건조하지도 않은데 자고 일어나면 눈이 유독 메마른게 안과를 다니는 것도 소용 없는가보다눈동자를 좌우로 몇번 돌리고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게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있다지금 이 상황이 꿈인가 현실인가 하는 생각에, 잠들어 있는 나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마른 눈을 좌우로 움직여봤다고요함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우두두두두... 둔탁한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두꺼운 벽 너머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 머리가 어지럽다공간감각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나쁜 어지러움은 언젠가 악몽을 꿀 때 100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순간의 느낌과 비슷하지만 지금은 꿈이 아니다눈을 떠봐도 어둠만이 보인다. 아니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무서워졌다
. 



동네에 공원이 생기고, 가로등이 갑자기 늘어난 작년 겨울부터 나는 어둠속에서 잠들지 못했다그 때 까지만해도 나는 캄캄한 방에서 잠드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밤중도 동틀 무렵처럼 환한 방에서는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블라인드와 커텐을 이중으로 달고말았다
돈은 들었지만 그 돈을 지불한 결과 나는 다시 평안한 밤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눈으로 미처 찾지못한 틈새로 빛은 새들어왔지만 희미한 안개처럼 어둠속에 흩어져있는 불빛은 불면의 밤에 비하자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이었다. 어느새 그 희미한 불빛에 적응이 된 나는 완전한 어둠속에서 홀로 잠들지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눈을 감기로 한다. 떠도 감아도 어둠이라면 감는 눈으로 맞이하는 어둠이 좀 더 친숙하니까. 눈을감자 어지러움이 잠시 강하게 느껴지고, 몸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이 속이 울렁거린다. 어제 술을 마신건가. 요즘은 건망증이 심해져서 이렇게 어제 저녁일도 곰곰히 생각해야 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다
머리를 굴려봐도 공회전만 일어날 뿐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순간 오른쪽 볼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관자놀이도 미미하게 간지러운 것 같다크게 간지럽지 않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을 지속시키고 싶지 않아 손을 들어 볼을 긁으려 했다헌데 이쯤이면 내 볼에 닿아야 할 손이 아직 느껴지지 않고 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팔을 계속 움직이려고 하지만 내 손의 행방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문득 오늘 낮의 기억이 떠올랐다
. 



오늘 낮에, 나는 그 사람과 이별을 했었다.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사소한데 신경이 쓰이는 날. 괜시리 했던 일에 후회를 보태게 되는 날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고 싶었다. 해는 떠있지만 흐릿한 빛이 왠지 멍텅한 내 기분 같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그냥 한없이 게으르고 싶었지만, 약속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약속이 있는날의 나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그 약속이 중요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약속이라는 그 존재가 내 시간에 얽히게 되면 스스로 분주함에 사로잡힌다
그냥 일상적인 약속이었고 특별히 더 잘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괜시리 거울 앞에서 아이섀도를 한 번 더 바르고, 한번에 슥슥 그리던 아이라인을 얇게 여러번 나눠 그리는 수고를 했다. 귀찮아서 의도적으로 빼먹었던 마스카라도 하고, 그냥 기분에 따라 고르던 향수도 옷과 화장색에 맞춰 골라 뿌리고 길을 나섰다.
버스를 타러 가는길에 가게 유리에 비친 구두가 안어울리는 것 같았고, 버스 유리창에 비춰본 내 얼굴은 평소보다 꼼꼼한 화장이 어색했다. 약속장소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기전 체크한 치마 주름이 마음에 걸리면서 '오늘 약속은 미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는 크게 싸우지도 않았고, 충분히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도 불구하고 헤어졌다. 그래, 그러자돌아선 나는 유리문에도, 버스 유리창에도 내 모습을 비춰보지 않고 그냥 바로 집에와서 화장을 깨끗하게 지웠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때 잠들어서 지금 깬건가. 분명 옆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으니 팔에 피가 안통해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운 마음은 조금씩 진정되었지만 작게나마 느껴지는 어깨의 움직임에 반해 팔은 여전히 감각이 없다. 손가락을 움직여보자. 지금까지 '손가락을 움직이는 과정'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손가락을 움직이고픈 내 마음이 오른손 대신 왼손을 움직이게 한건지 미미한 감각이 왼팔에서 느껴지는 그 순간,

"
!!!!"

소리를 내지를 정도의 통증이 왼팔 아래에서 몸 깊숙히 찔러온다.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던 정신은 순간적으로 다시 아득해지고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몸에 힘이 없는데 반해 심장이 굉장히 빨리 뛰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몰아 쉬려고 해도 코가 꽉 막혀있어 쉽지 않은데다가, 콧 속에 콧물이 나는 듯 스물거리며 간지러운게 아픔도 아픔이지만 간지러움 참는 것도 적잖이 곤욕이다. 코가 간지럽기 시작하자 볼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도 더 민감하게 느껴지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짜증을 내면서 난 잠에서 깨어났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려 누워 잔 덕분에 허리도 아프고, 맨바닥을 베고 있던 머리 한 귀퉁이도 얼얼한 느낌이 들면서 눈도 뜨기 전에 짜증부터 내면서 나는 바로 앉았다. 그리고 눈도 뜨지 않은채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는가? 이렇게 울 정도로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가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내 눈물의 타당성을 찾기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곧, 이 모든 상황이 바보같다는 생각과, 어쨌든 지금은 '내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님 '그에 대한 배신감에 참을 수 없는지'와 상관없이 그냥 울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본격적으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거친숨을 들이쉬고온 몸을 들썩이며 숨을 들이쉬다가 주먹으로 바닥을 치기도 하고, 쉼표없이 길게 울음소리를 늘이기도 하면서. 창 너머로 들어오는 노을에 눈이부셔 더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때 까지.      

노을이 방에 가득 차오르고 나는 붉은 빛 한가운데 맥없이 앉아있었다.

오후 햇살을 마주하면 너그럽고 여유로워졌다시간이 더 흘러가면서 햇살이 더더욱 농밀해져 묵직한 노을빛으로 변하면잊고 지내던 방랑벽이 떠오르면서 설레임이 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가 멍하도록 한참을 울었더니 여유롭지도 않고, 설레이지도 않았다. 다만 방랑벽이 심하게 떠올라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어졌다.
두 손으로 마구 닦은 눈물이 온 얼굴 위에서 말라버린 탓에 불규칙적으로 땡기는 것 같았고, 눈물은 얼굴너머 목, 배까지 흘러 들어간 것 같아 샤워를 하지 않으면 찝찝한 기분이 씻기지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몸이 풀리기 전에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차를 몰고 도로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아직 해가 긴 탓에 미처 생각지 못한 퇴근길 교통체증을 마주했다. 하늘은 맑기만 한데 비가 올꺼라는 라디오 일기예보는 듣는둥 마는둥 꺼버렸지만, 꽉막힌 길 위에 있어도 그다지 짜증이 나지 않았다. 교통체증이 익숙치 않았기 때문일까. 아까 울면서 감정을 다 소모한 탓에 단순히 짜증낼 기력이 없었던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항상 막힌 길 위에서 운전하는건 그였다. 그가 혼잣말로 막히는 길과 끼어드는 차에 대한 짜증을 간간히 표현하면 나는 그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몇가지 질문에 건성건성 대답하던 그는 곧 막힌 길 따위는 잊고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적당히 운을 맞춰주고몇가지 질문만 하다가 앞차가 움직이면 그 타이밍을 알려줬다. 그러면 그는 막힌길을 지나고도 교통체증을 기억하지 못했다.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꽉 막힌 코로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코와 목 사이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왈칵 목으로 넘어오고 잠시 코를 통해 공기가 들어오는가 싶었지만 다시 막히기 시작한다. 코가 뚤린 아주 잠깐동안 느껴진 비린 냄새에서, 왈칵 목으로 넘어온 그것이 콧물이 아니라 피라는 것을 알아챘다. 미간이 싸하게 아파오면서 어지러운 것이 코피를 심하게 흘릴때와 느낌이 같다. 싸한 느낌과는 달리 코피는 코 밖으로 흘러나지 않고 콧속에서 아까와 같은 간지러움으로만 느껴진다.



자주 지나던 오거리 신호등이 보였다.
나는 직진 할 생각이었으나 앞에 길게 줄지어 서있는 붉은 빛들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차가 막히는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붉은등이 울다 만 눈과같은 형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차가 오른쪽 샛길로 빠지는 타이밍에 맞춰 나도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좀 달리고 싶었으니까앞차를 따라 생각없이 오른쪽, 왼쪽으로 핸들을 꺾다보니 교외로 빠져나가는 도시 고속도로 진입로가 보였다.
길 위로 차를 올리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차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차가 가속되면서 점점 올라가는 기분이 마치 내 몸이 둥실 뜨는 것 같이 느껴지자내 안의 방랑벽이 심장을 미미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 진동이 심장에서 핸들을 통해 차 전체에 퍼질 때까지 온 체중을 엑셀레이터에 실어 속도를 올렸다
 
좋은말로 표현하면 그는 이상주의자였고, 나쁘게 표현하면 철이 없었다. 그의 꿈은 항상 '밝은 산등성이' 있었다. 산 밑에서 그 산등성이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불가능한 길은 아니었으나 가능하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판단하지 않았고, 그의 꿈을 채근하지도 않았다. 구름에 앉아있는 그의 시선을 잡아매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지난 내 모습과 닮아있었고, '밝은 산등성이의 미래'는 내가 꿈꾸던 '먼 산 꼭대기의 나무'와 닮아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선택하면서 놓아버려야 했던 이상향, 멀리 빛나는 꿈을 쫓는 그의 모습은 내가 외면해야만 했던, 내게 버림받은 나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아서 나는 어쩌면 그가 꿈을 쫓아 뛰는것을 보고, 옆에서 도와주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 과속방지 카메라가 보였지만, 네비게이션은 잠잠하다그와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네비게이션의 소리가 방해되는걸 참지 못하고 꺼버린게 분명했다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기보단 이런날 이정도 벌금이야 이벤트처럼 내줘도 상관없겠지네비게이션을 껐던 이유는 오래 지속되는 침묵속에서 저 혼자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랑을 꿈꾸는가 물었다그는 내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만을 던진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가 꿈꾸는 밝은 미래엔 사랑에 대한 지도는 없었고, 지도에 대해서는 내게 의지하고 싶어했으며, 사랑에 대해 꿈꾸기를 게을리 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내가 꿈꾸는 사랑을 꿈꾸지 못하는 그가 내 이상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길에 어둠이 내리자 좁은길에 드문드문 보이는 가로등이 내가 꽤나 멀리 나왔다는 것을 알려줬다아무생각 없이 길만따라 운전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직진만 하는건 좀 곤란하겠다고 느끼고 있던 찰나녹색 표지판이 머리위로 지나갔다. 어둠속이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OO]라고 갈색 바탕에 표시된게 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저 절까지만 갔다가 돌아가자.
길은 한 길 밖에 없었고, 간혹 갈라지는 길이 보였지만 절은 직진 방향에 있었으므로 아무생각하지 않고 직진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앞에 간혹 보이다 말았다 하는 반대 차선의 불빛을 보니 굽이진 산 중턱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고그 길은 썩 멀지 않아보였다. 반드시 그 절에 들러야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내 습관때문에라도 절 입구에서 차를 돌려 나와야 했다

가다가 중지하는 모든 일이 손해보는 것은 아니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시작은 끝을 봐야만 하는 그것이 내 나름의 철칙이었고, 큰 이유없이 중간에 머리를 돌리면 시작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다른일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도 아마 그런 나의 성격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끔씩 속을 알 수 없는 이상주의자의 겉모습은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매혹적이라 성큼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내가 사랑한 것은 어쩌면 '그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노력'이 없으면 우리의 관계는 흩어져버릴수도 있다는 것. 나는 알고 있었으나 모른척 했고, 그는 어쩌면 몰랐던 그 사실이 침묵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고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암묵적으로. 그래서 그는 이별을 고했고 나는 그 이별을 받아들였다


몸이 떨린다. 꾹 참고있는 딸꾹질이 터져나오는 것 처럼 의지와 상관없는 움직임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다가, 그 횟수와 강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몸이 미미하게 떨리면서 어둠속의 무언가에 몸이 불규칙적으로 닿았다 떨어진다.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내 몸이 어둠속에서 알아낸 사실은 떨고 있는건 온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 다리들이 먼곳에 있는 것 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어둠속의 내 몸은 어디까지가 나일까.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는 내 오른손에 비해,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느리고 미미하게나마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좋은것일까? 발작처럼 뭄이 떨려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만큼 멀리 있는 것 같은데도? 

행적을 알 수 없는 내 몸. 스멀스멀 몸 위로 뭔가 흘러다니는 듯한 간지러움.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안 어디선가 마구 터지는 것 같고, 무언가에 옥죄이는 것 같은 답답함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두려웠다. 점점 더 밭아지는 호흡이 심장을 더 빠르게 내몰고, 가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어 두려움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아아..아.."


결국,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소리로 뱉어냈다. 고요함 속에 떨어지는 목소리는 메마르고, 거칠고, 이질적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나던 그 순간, 눈물과 동시에 두가지 질문이 떠올랐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는가', '그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는가'. 왜 나는 울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했던걸까. 
산으로 접어들었는지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오르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고, 그런 '내 노력이 실패했다'는 데서 배신감을 느낀것 같다고. 

지금까지 내 사랑의 방향은 내가 원하는 대상만을 향해있었다. 사람 마음이 종이가 아닌 다음에야 접으라고 한다고 접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원치않는 대상이 내게 마음을 열면 지독하게 쌀쌀맞은 말투로 종이접듯 접으라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 어느날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사람이 내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 때 생각했다. 이상형이란 그저 관념일 뿐, 실제 마음과는 다른 것이라고. 그래서 한 번 쯤은 나를 향하는 마음에게도 기회를 줘보자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보이는 것으로만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길 모퉁이에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없고, 급한 마음으로 재촉해서 가면 다칠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 지금 오르고 있는 이 길을 보고 사람 마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이나, 나의 마음이나. 한편으로는 울컥, 억울한 마음이 치밀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내게 한없이 잘 해 줄 것 같이 해놓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노력한 것은 나 뿐이었잖아. 그는 나를 위해 그정도의 수고로움도 하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그가 그정도 그릇밖에 안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그정도 밖에 좋아하지 않아서 였는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유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화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브레이크 밟는 횟수가 줄어들고 확확 밟기 시작하는 운전습관이 눈에 띄이는 것을 보니, 나는 생각 이상으로 짜증이 나고 있었다. 조금씩 거칠게 차를 몰면서 스스로 묻고 답했다. 슬펐는가.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운다고 해서 슬픔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아마도 배신감이 지금 내 기분의 원인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보여준 호의를 믿고, 그 사람이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겠다고 노력했던 나에게, 그가 돌려보낸 그것은 헤어짐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위해 노력과 수고로움을 무릅쓸 마음이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생각이 결론에 도달하자 감정이 점점 치밀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손 끝이 차가워지면서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손에서 시작된 냉기가 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부들거림이 팔을따라 어깨까지 올라가고, 온 몸에서 오한이 느껴지면서 몸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아졌다. 마치 한겨울에 밖에서 가만히 서있다가 움직일 때 처럼.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은 것과 비례하게 짜증도 점점 치밀어 올랐고, 나는 에이씨. 소리를 내며 코너링 직전에 브레이크를 확 밟았다. 

신에게 맹세코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몸이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내 통제하에 있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어둠도, 고요함도, 지금 내가 혼자 있다는 것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내 정신이 너무나도 명민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맑은 정신에 반해 내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도.



존(Zone)이라는 순간이 있다. 운동 선수가 집중할 때, 예술가가 경지에 이르러 창조할 때, 생사가 오가는 찰나의 순간.. 존에 있을 때 사람의 뇌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능력을 발휘하게 되며, 사람들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순긴으로 회귀(Flash back)하여 그 순간의 모든 감각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왼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점점 멀어지는 검은 아스팔트. 내게 제일 싫어하는 100층 엘리베이터 꿈에서 느낀것과 같이 기분나쁘게 몸이 떠오르는 느낌. 나는 아주 천천히, 브레이크가 아닌 엑셀레이터위에 있는 내 발을 다시 브레이크로 옮겨 놓으며,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 때와 같은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고심끝에 열어본 시험 결과서에 '탈락' 이라는 글자를 봤을 때 처럼. 닫혀버린 게이트 앞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볼 때 처럼. 해변가에서 잃어버린 열쇠 찾기를 포기하고 일어설 때 처럼.     
그리고 씁쓸함과 동시에 슬픔이 가슴 밑에서 아련하게 퍼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얇은 사각티슈에 떨어진 잉크가 퍼지는 것 같은 슬픔. 

내가 보았던 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은 아니었다. 그저 찰나였던 그 순간을 평소만큼 묘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눈물이 고였다.
눈가가 뜨뜻해지면서 눈물이 고였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볼에서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던 간지러움은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가고, 뻑뻑하던 눈을 적시며 고여가던 눈물은 흐르고 다시 고였다가 흐르기를 반복했지만 눈물말고는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꼬리를 따라 흐르는 눈물이 이마를 가로질러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지고 발 밑에서는 두꺼운 벽 너머에서 들리는 것 같은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우두두두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