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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고양이

우울에 대한 단상들


1. 즐겁게 웃고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집중해서 일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우울하다. 웃으며 보낸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하는 동안 집중하지 않아서 우울이 찾아온 것도 아니다. 우울이란 물이 가득한 목욕탕에 떠있는 때와 같아서 밀어내고 걷어내도 부지불식간에 내 몸 어디엔가 붙어버리는 존재. 그러니 내가 너를 만나고도 우울하다고 한들 서운해하지 말 것이며, 일을 하고도 우울하다고 해서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는 말아달라.

2. 술을 줄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예 끊으려고 했는데 술과 함께 인간관계도 다 끊길 것 같아 최소한의 음주는 허용하기로 했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마시는 한 잔의 맛난 술은 즐거움을 더욱 부추기므로 가벼운 술은 허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의 경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우울이니, 즐거운 그 때 술에 손대기 전 나의 우울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시작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간과하고 지내는 사실. 우울은 술을 먹고 자란다. 당신이 모르는 이유는 아직 우울이 눈이 띄일만큼 자라지 않았거나 당신이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사방이 고요하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 내면에서 소리가 올라온다. 나에게 말을 건다. 시작은 별 것 아닌 사소함이었지만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나의 감정이 덩굴처럼 엮여서 올라온다. 짜증이 올라오고, 분노가 올라오고, 사랑이 올라오고, 애증이 올라오고, 연민이 올라오고, 상처받은 자존심이 올라오면서 나의 이성은 우울에 잠식되려고 한다. 아직 잠식되지 않은 반편의 뇌가 명령을 한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나의 몸은 이성의 명령을 들어 몸을 움직이고 다른곳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곧 아까의 그 덩굴들이 스멀스멀 자라난다. 한참을 우울과 이성이 나를 두고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시계를 보면 1분이 겨우 지났을 뿐이다. 현재의 시각이 내 존재와 위치에 대해 설명해준다. 현존하는 시간이 사념의 덩쿨을 싹뚝 잘라버린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번잡할 때 시계를 보고 달력을 본다. 나의 '현위치'는 어디인가 확인하기 위해.

4. 우울함이란 숨겨야 하는 치부같은 것. 누군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으며, 누군들 그정도 좌절 안겪는 사람이 어디있나. 너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네 마음이 나약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아니다. 누구도 내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은 말한다. 강인한 정신이 우대받는 세상에 너같은 나약한 존재는 설 곳이 없다고. 그래서 나는 웃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우울이라 한다. 강한 세상에서 나는 나의 우울이 부끄러웠다.

5. 우울한 상태란 이런 것이다.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의 반응이 정상보다 조금 다르다는 것. 우울해지는 과정을 조금 더 상세히 관찰해보자. 그대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대의 몸은 똑똑하므로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의 평형을 찾기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래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날 굉장히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니면 일상적이지만 비교적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일정 기간 이상 받았다고 봐도 좋다. 당신의 교감신경은 필요 이상으로 활성화되어버렸고, 당신의 몸은 끊임없이 평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정수준 이상이 지나버리자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고 그대의 몸을 놓아버렸다. 교감신경도 신경인지라 어느 수준이 지나자 외부 자극에 피로를 느껴 민감도가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둔해진 교감신경이 부교감 신경과 동일해지면 참 좋겠지만 피곤한 교감신경은 정상 값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교감신경만 잘먹고 잘 살았냐면 그건 또 아니란 말씀. 교감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교감신경도 무던히 노력했던 바 같이 힘들어 축 처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율 신경계가 이도저도 안될만큼 힘들고 피곤한 상태가 바로 우울증이라는 이야기. 

6..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의료계 종사자가 쉽게 설명한 말이니 믿어도 된다.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시든가.

7.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을 각오로 살면 백번은 더 살았겠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살하는 사람들 중 과연 몇명이 죽을 각오로 죽을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들은 죽을 각오가 아니라 그냥 그것 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아 그 길로 가는 것 뿐이다. 자살이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의 회피이고 도망이니까. 무엇에 대해? 삶으로부터. 선택은 힘들고, 내일은 알 수 없고, 더는 뭐를 어찌해야 할 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그 길에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죽으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나는 안죽어봐서 모르겠다. 단지 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 죽어서 도망친 것을 죽어서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달아났다고 안도하고 고개 들었을 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서운 존재와 눈 마주치는 공포는 죽어서도 느끼기 싫다. 그땐 대체 어디로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8. 내 생각에 죽을 각오란 그런 것이다. 죽은셈 치고 다 버리는 것. 다 버리는데 돈을 못버리겠는가? 죽을 각오로 안살아도 돈 욕심으로나마 살 수 있겠구나. 다 버리겠는데 명예는 못버리겠는가? 자살뒤에 사람들이 제 무덤에 손가락질 하는게 수치스러워서라도 살 사람이다. 세속적인 욕심을 가진 사람들을 흉보자는게 아니다. 그들은 그것에 의지해서라도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지마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죽은셈 치고 다 버려라. 그리고 이것 하나 못하면 죽어서도 후회할 것 같은 일을 해보자. 뭐가 걸리겠는가.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으면서. 나? 나는 죽은셈치고 다 버리려고 봤더니 못버리는게 꽤 되더라. 하지만 살기위해 죽은셈치고 몇가지를 버려야 겠다는 생각은 했다. 

9. 홀로있는 그대. 벽에 써서 붙여놓자. 눈 뜨면 볼 수 있도록, 별 노력 없어도 볼 수 있도록 어딘가에 써서 붙여놓자. '우울할땐 일단 나가서 뛰어라', '기운이 없으면 무조건 나가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자' 우울함은 너의 기운을 야금야금 빼먹는 것 같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저 기운의 중심을 낮은곳으로 끌어내리고 있을 뿐이다. 너는 나약한게 아니라 그저 몸이 처지는 중이라는 뜻이다. 뛰고 줄넘기를 하면 기운의 중심이 위로 올라온다. 어려운 설명은 않겠다. 우울한 그대. 우울해도 상관 없더라도 일단 나가서 20분만 뛰고 오자.

10. 우울에 대한 짧은 단상이랬으면서 끝은 설교로 끝난 이야기. 뭐 그럼 어떤가 결국 저 설교는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그 설교를 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나의 우울을 벗어 던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으면 손톱이 자란다던데. 내 생각을 먹고 자란 손톱이 내 손을 할퀴기 전에 잘라버리고, 손톱이 먹다남긴 상념은 이렇게 글로 풀어버리는 것. 이제는 사그러져버린 나의 우울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적어도 내 우울을 이겨낼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믿고 오늘도 뭔가를 끄적이고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