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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않는늑대/동양늑대

인공눈물 이야기 3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런데 혼자다.

이상한 일이다. 방 안 한가득 가득차 있는 저것들은 나와 무엇이 달라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가.
그녀가 간혹 나를 두고가던 그 계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이제 그녀는 나 없이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있고, 혹 눈을 뜨지 못하는 아침을 맞이하더라도 말간 시선을 찾을때까지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로 아침 해가 길어졌다. 그말은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덜 필요해졌다는 말이고, 나를 두고 밖으로 나가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별로 상관이 없었으나 이제는 상관 있어져버린 '고요함'을 어떻게든 깨고 싶어졌다.
다른 물건들은 일종의 규칙에 따라 모여있는 것 같았다.

방에서 숫적으로 가장 우세한 책들은 벽과 나무 판자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서로의 몸 위에 겹겹이 누워있지만, 별로 서로에게 애착은 없어보인다. 세워뒀으니 그냥 그 곳에 서있는다는 것이 겉으로 보일정도로 열 맞춰 서있는 책들은 몇번 말을 걸어봤으나 실패한 최초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벽에 붙여진 그림이라고 해도 상관 없을만큼 제 부피값을 못했다.

나는 무언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말을 걸어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게 뭔가 몇일을 둘러본 결과 선택한 대상은
그녀가 돌아와서 잠들 때 까지 끊임없이 말하는 깜둥이 삼인방.
하나는 책상위에 앉아있고, 하나는 낮은 서랍장 위에, 남은 한 녀석은 가끔씩만 만날 수 있어 아직까지는 좀 낯설다.

책상위의 까만 녀석은 그녀가 돌아와 동그란 부분을 꼭 누르면 파란불을 켜며 눈을뜬다.
까만 녀석에 셋이나 되니 편의상 깜둥이 1이라고 불러야겠다. 
깜둥이 1과 그녀는 별 말이 없다. 그녀는 깜둥이 1을 그저 바라보고 손으로 두드리다가 웃지만 까만 녀석은 웃지 않는다. 한 번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눈길을 돌려버려 말 걸 타이밍을 놓쳤다. 가끔 무언가 소리를 내지만 자주 있는일은 아니다. 그녀석이 내는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까지 다양했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나올때 그녀는 가끔 소리를 따라내거나 몸을 움직이며 기분좋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깜둥이 1이 그녀의 기쁨에 일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마저도 깜둥이 1은 즐거워 보이지 않아 그건 아닌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낮은 서랍장 위의 까만녀석은.... 편의상 깜둥이 2 라고 불러야겠다.
깜둥이 2는 깜둥이 1보다 크고, 말도 많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깜둥이 1보다 적지만, 적어도 눈을 뜨고있는 동안 깜둥이 2는 그녀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다. 그녀는 깜둥이 2를 보면서 뭐라고 간간히 혼잣말을 하는데 약간의 감탄사 같았고, 그 때 깜둥이 2에는 "뉴스"라는 글자가 떠있기도 했다. 가끔 그녀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지거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 머리를 흐트리는 날은 늦은 시간까지, 그녀가 잠들고도 깜둥이 2 홀로 한참을 웃고 떠들기도 했다.
그녀가 집을 나서고, 집안이 다시 고요해지자 나는 깜둥이 2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녀가 없으면 말하지 않나요?"
"나는 관객이 있어야 말을하는 존재니까"
"그럼 관객이 없으면 말할 수 없나요?"
"소리는 낼 수 있지만, 소리내지 않는것과 다르지 않지. 저기 앉은 컴퓨터 저 녀석도 마찬가지고, 우린 그래"

깜둥이 1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깜둥이 2가 말했다.

"뭐 물론, 관객이 있다고 해서 나를 보는건 아니야, 내가 보여주는 만들어진 전기신호와 빛을 보고 뭔가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저 여자는 그게 꽤나 재미있나봐. 가끔 웃다가 울다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여튼 나는 나를 보는 관객을 구경하는것도 썩 재밌더라고"
"좋겠네요. 그래도 당신은 고요함이 싫을때 소리를 낼 수 있잖아요"

그 말에 깜둥이 2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되는데. 나는 저 여자가 전원을 넣어주기 전엔 소리를 낼 수 없어.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들은 혼자서 소리내는걸 불운한 징조로 생각해.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됐을 때, 나랑 비슷한 녀석이 아주아주 많았던 곳에서, 몇몇은 관객없이 계속 소리를 내기도 했었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지. 세상에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관객없이 혼자 떠들다 사라지고 마는거야.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 무작위로 선택할 때, 우리 텔레비젼들 에게는 아주 무서운 순간이지. 그래서 가끔 저 여자가 나를 놔두고 어디론가 가면 불안해. 뭐 물론 아주 잠깐씩이었고, 곧 돌아와 긴 시간 나를 홀로 소리 내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없는거니까."

말을 하면서 스스로를 텔레비전이라 칭한 깜둥이 2는 뭔가 꺼림찍한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아.. 네... 근데 까맣고 네모난 작은 녀석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아이도 텔레비전인가요?"
"까맣고 작은?"

텔레비전은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새로온지 얼마 안됐는데... 별로 보지 못했네요. 저기 컴.. 뭐 여튼 저분하고 가끔 가까이 지내는 것 같던데..."
"아. 핸드폰"

텔레비전은 생각난듯이 크게 말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몰라 그딴녀석. 그래봐야 우리랑 마찬가지로 전기로 먹고사는 주제에 잘난척이 하늘을 찌르는 형편없는 녀석이야."

그 떄, 문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녀라고 확신한 우리는 입을 닫고 처음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고요속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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